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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보는 일

김승옥, 《무진기행》, 민음사, 1964(초판)


교과서에서 배운 단편 소설 중에서 졸업하고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무진기행>이 아닐까. 교과서에 실리는 소설이라는 것이 그렇다. tv 연속극처럼 to be continued 도 아니면서 뒷부분을 댕강 잘라버리거나 앞뒤 내용 무시하고 누가 골랐는지 알 수 없는 중간 부분만 툭 떼어 놓거나. 그래서 그 작품은 읽은 것도 아니고 안 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단편적인 이미지만을 학생들의 머리에 남긴다. 이런 불평할 거면 스스로 책을 사든 도서관을 가든 작품 전체를 읽어봤어야 했으나 그런 열정까지는 또 없었던 나도 나지만.


교과서에 실린 <무진기행>이 내 머릿속에 남긴 것은 ‘무진’이 가공의 도시 이름이라는 사실과 작품 속 그 무진시의 안개가 월출산을 닮았다는 이미지와 수위 높은 성 묘사, 그 정도였다. 이 중에 정답은 무진이 가공의 도시 이름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인간의 기억이란 얼마나 제멋대로인가. 이렇게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 그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어째서 무진이 월출산을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어디선가 보았던 월출산의 안개 사진이라도 떠올렸을까. 다시 읽은 <무진기행>에는 바닷가가 나온다. 무진이 어느 지역을 모델로 두고 그린 소설이라면 내륙에 위치하는 월출산은  후보가   없는 셈이다. 반면 작가의 고향은 월출산에서 동쪽으로  나아가 바다와 접하고 있는 순천이다. 아마도 ‘확신의 무진. 물론 어차피 가공의 장소이니 내가 읽으며 월출산을 떠올린다면 월출산이 되는 것이겠지만.


‘수위 높은 성 묘사’라는 기억 역시 잘못되었다. 신성한 문학 교과서에서 살짝 읽었을 때는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자극적이었다는 기억이 있는데 다시 읽어보니 상황 자체는 자극적이나 그렇다고 외설스럽게 묘사하지는 않았다. 예민하고 상상력 풍부한 사춘기 청소년의 기억 왜곡이었던가.


이 책 《무진기행》은 여기까지 짚어본 <무진기행>을 표제작으로 1960년대 김승옥 소설가의 단편 소설 총 10편이 실려있다. 60년대에 지어진 소설들이기 때문에 지닐 수 있는 진정한 레트로의 바이브를 느낄 수 있다. 거기에 감각적인 글솜씨가 더해져 굳이 이미지로 표현해보자면 총천연색 레트로풍의 향연이었던 BTS의 다이너마이트 뮤비를 보는 느낌이랄까. 맛으로 따지자면 새빨간 방울토마토와 꾸덕꾸덕하고 고릿한 치즈를 넣은 뒤 발사믹 드레싱을 끼얹은, 색이 선명하고 새큼한 샐러드 같은 느낌.


“전 혈액형에 대해서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꼭 자기의 혈액형이 나타내 주는-그, 생물책에 씌어 있지 않아요?-꼭 그 성격대로 이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세상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성격밖에 없을 게 아니에요?” “그게 어디 믿음입니까? 희망이지.” “ 전 제가 바라는 것은 그대로 믿어 버리는 성격이에요.” “그건 무슨 혈액형입니까?” “바보라는 이름의 혈액형이에요.” (<무진기행>, 35쪽)


소설가가 영화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읽어서일까? 이 대화문은 마치 이제 막 흑백을 벗고 색을 입은 옛날 한국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이 서로 가까이 다가갈 때 주고받을 법한 티키타카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 글이 쓰인 당시가 실제로 이제 막 컬러 영화가 만들어지려던 시기였으므로 이것은 그 시대 분위기를 내려고 지어낸 것이 아닌, 실제 그 시대의 분위기일 터.

<무진기행>을 각색한 영화 <안개>. 소설가가 직접 각색에 참여했다. 후에 <감자>라는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단다. 사진은 《한국일보》기사에서.


그런가 하면 마치 て로 잇고 잇고 또 이은 일본 소설 속 문장 같은 문장이 보이는 것도 흥미롭다. 예를 들면 소설가가 대학 재학 중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작품이 된 <생명연습>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내 어머니의 ‘남자관계’를 내가 어렸을 때는 막연한 어떤 심리에 사로잡혀 미워하고 심지어 내 어머니는 ‘갈보’라고까지 욕을 했고 그리고 나의 기억에도 아버지와 놀던 세세한 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애타게 그리워했고 그 아버지를 잊어버리고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어머니를 더욱 미워하게 됐고 그래서 혹시 그런 남자가 집에 오기라도 하면 나는 일부러 방문을 탁 닫기도 하고 큰 장독으로 돌을 가져와서 차마 독을 쾅 깨어 버리지는 못하고 땅땅 두들겨 보고 그러다가 그 독아지 속에서 울려오는 무거운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며 어머니에 관한 일은 잊어버리기로 하곤 하였다. (<생명연습>, 95쪽)


이 긴 문장을 그 흔한 쉼표 하나 없이 이어 나가면서도 의미가 흐트러지지 않는 점에 놀랄 따름이다. 오히려 리듬감마저 느껴진다. 소설가는 이 책의 매 작품 속에서 다양하게 변주하며 마치 곡예를 부리듯 이런 문장을 선보인다.


문체 외에도 소설의 소재와 내용 역시 흥미롭다. <역사>는 하숙생인 주인공이 전에 살던 창신동 하숙집과 친구가 친척집이라며 소개한 새 하숙집의 대조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창신동 집은 벽지 대신 신문이 발리고 천장마저 묘하게 휘어진 하숙집으로, 성명 철학자에게 가서 자기 이름을 보여보고 싶지만 이름을 보자마자 갈보라는 것을 들킬까 두려워 갈지 말지 갈팡질팡하는 영자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힘을 주체하지 못하여 매일 밤 동대문에 올라가 돌을 들어 이리저리 옮겨 놓는 서 씨가 살고 있다. 반면 새 하숙집에서는 매일 똑같은 시각에 ‘엘리제를 위하여’ 피아노 연주가 울려 퍼지고 또 정해진 시각에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한 다음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스케줄대로 공부한 뒤 잠을 잔다. 환멸을 느낀 주인공이 공부 시간에 기타를 치자 주인 할아버지는 다 함께 미싱을 돌리는 오전 10시로 기타 치는 시간을 배정한다. 주인공은 이런 틀에 박힌 생활양식과 그것을 강요하는 할아버지를 혐오한다.


빈민가에 살던 사람들의 그 끝없는 공전 같아 뵈던 생활이 이곳보다는 오히려 더 알찬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나의 감정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어느 쪽인가 한 편이 틀려 있다는 생각이 나를 몹시 짓누르기 시작했다. 본질적으로는 두 쪽이 같지 않느냐는 의문이 나의 내부 한쪽에서 솟아 나오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강한 힘으로 나를 끌고 가는 ‘어느 쪽인가 한편이 틀려 있다’라는 집념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발전하여, 미리 그러기로 되어 있었다는 듯이, 나는 이 양옥 식구들 생활을 빈껍데기에 비유하고 있었다. (<역사>, 147쪽)


빈껍데기 같은, 그러나 완고한 그 세계에 균열을 내고 싶었던 나는 결국 식구들이 자기 전 마시는 보리차에 흥분제를 타고 다들 잠들어 있기로 약속된 시간에 피아노를 두드린다. 과연 균열은 생겼을까.


<차나 한 잔>은 주인공인 ‘그’의 직업 만화가가 주는 이미지 때문일까.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검정 글씨와 흰 여백의 글일 뿐인데도 다양한 색채가 느껴지는 감각적인 단편이었다. 신문에 매일 연재하던 만화가 하루 이틀 빠지고 실리지 않더니 결국 ‘목 잘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단편의 제목인 <차나 한 잔>은 이제 만화를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문화부장이 주인공에게 하기 위해 꺼낸 말이다. “차나 한잔…” 점입가경으로 주인공은 배탈이 나서 하루 종일 변의가 끓는다. 그런 몸을 이끌고 다음 연재할 신문을 찾는 것인지, 설사를 멈추게 하는 약 ‘크로로마이신’을 파는 약국을 찾는 것인지, 그냥 방황하는 것인지 모를 짧은 로드무비가 펼쳐진다.


1960년대에 쓰이던 어휘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기에 요즘 세상에서 레트로라 불리며 멋스럽다고 여겨지는 매력이 유난히 도드라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크로로마이신, 문화부장, 망가(만화의 일본어), 레지, 심부름하는 계집애, 고슴도치를 닮은 룸펜 청년, 성냥, 변소


그러나 무엇이 그렇게 느끼게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한편으로는 몹시 세련되었다. 특히 이런 부분들 말이다.


조용한 다방으로 가자. 그러나 손님도 몇 사람 없고 레지도 우울한 얼굴로 전축만 지켜보는 그런 다방에 가서 앉아 있기는 싫었다. 지금 자기가 그런 다방의 딱딱한 의자 위에 앉아 있으면 아마 최고로 몰골이 추해 보일 것이다. 어쩌면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나오게 되어 버릴 것 같아서 그는 좀 조용한 다방으로, 좀 조용한 다방으로를 뇌이면서 ‘초원’이라는 아주 번잡한 다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방의 이름이 가리키듯이 상록수들로써 가득 장식되어 온실 같은 실내가 무척 넓었다. 카운터만 해도 너댓 개나 되는 모양이었다. 그 어둑신하고 넓은 실내에 사람들이 꽉 차 있고 스피커들이 운동회 때처럼 음악을 내지르고 있었다. (<차나 한 잔>, 174-175쪽)


나도 종종 조용한 다방으로, 조용한 곳으로를 뇌이면서도 번잡한 다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일이 있으므로 나 역시 이해할 수 없던 나 자신의 행위를 캐치한 예리한 관찰력에 감탄하며, 굳이 글로 써 내려간 부지런함에도 감탄했고, ‘스피커들이 운동회 때처럼 음악을 내질렀다’고 표현하는 유머 감각에도 감탄했다. 읽는 내내 즐거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공감한 글은 책 가장 첫머리에 나오는, 1980년 ‘작가의 말’이었다. 짤막한 그 글은 머릿속에만 맴돌던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보는 일일 뿐.

<1980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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