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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만연체로 써 내려 간 킬러의 이야기

구병모, 《파과》, 자음과모음, 2013


만연체로 쓰인 소설이라고 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만연체는 문장을 의도적으로 길게 늘여 쓴 문체를 말한다. 이건 나의 말이고 조금 더 정확하게 단어의 뜻을 이해하려면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를 빌려오는 것이 옳겠다. 


만연체: (문학) 많은 어구를 이용하여 반복ㆍ부연ㆍ수식ㆍ설명함으로써 문장을 장황하게 표현하는 문체. 정보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으나 문장의 긴밀성이 떨어진다는 흠이 있다.


https://ko.dict.naver.com/#/entry/koko/faa7ca0d792b488185595ff90b6b89ca



만연체라고 하면 영어로 쓴 글에서 끝날 만하면 that으로 잇고 잇고 또 이은 문장이나, 일본어 글에서 이쯤이면 그냥 점찍을 법도 한데 그 점찍을 자리에 ~て 따위를 써 어디까지고 연결해 자꾸 앞 문장 내용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문장들이 생각나서 그 문체 자체가 번역 투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국 고전 문학에서도 만연체는 흔히 쓰였다고 한다. 하긴 판소리를 들어보면 마침표를 찍지 않고 자꾸 화자가 말을 허고 상황이 쉴 새 없이 바뀌는디! 


고전 문학이나 근대 소설에도 만연체를 쓴 재미있는 소설이 많겠지만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구병모 소설가의 소설 대부분이 이 만연체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끌려 선택하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반복·부연·수식·설명이 많으면 글의 호흡이 빠를 수가 없지 않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이 넘치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킬러의 이야기를 다룬다. 겉보기에는 크게 인상적일 것 없는, 예순을 넘긴 노부인이다. 끝내 그 실명은 밝혀지지 않지만 어쨌든 이 소설 안에서는 조각으로 불린다. 한평생을 의뢰받은 방역-의뢰를 받아 목적이 되는 사람을 제거하는 일-을 완수하며 살았다. 그 긴박한 상황과 현란한 솜씨가 만연체 문장에 담겼다. 


구병모 소설가는 의도적으로, 쉽게 읽히지 않는 문체를 선택했다. 거치적거리는 문장으로 독자들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을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며 남겼다. 


https://www.joongang.co.kr/amparticle/23783716


‘명료하게 읽히는 문장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삐딱선을 타고 싶었다’고. 하지만 이 말은 그 문장이 명료하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문장 길이가 기네’를 의식할지언정 ‘이 말이 무슨 뜻이야’가 되지는 않는다. 긴 문장에 푹 빠져 읽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이 문장의 입구가 어디였더라, 하고 까먹는 식이다. 모든 문장이 강박적으로 길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2020년 5월 《월간중앙》에 실린 칼럼 "[신준봉 전문기자의 ‘젊은 작가 列傳’(11)] 판타지 소설로 성인·청소년 사로잡는 구병모)"에서는 《파과》의 문체는 만연체와는 비교적 거리가 있고, 또 구병모 소설가는 긴 문장을 즐겨 쓰나 짧은 문장 역시 능숙하게 다룬다고 평한다.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0103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있지 않을까, 나는 찾아보았다. 아니, 영화로 안 만들어졌네? 60대 여성 킬러가 나오는 영화는 아무도 보지 않아서 일까? 


나는 이미 조각 역에 이주실 배우를 캐스팅했다. 나이대에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어쩌나. 나는 그 외 인물은 떠오르지 않았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조각이 지하철에 올라탄 순간부터 그랬다. 조각과 대치하는 투우는 소설에 묘사된 대로 체격이 좋은 30대 남자 배우라면 좋겠지만 누구가 되든 상관없다. 그만큼 이 소설은 조각의 이야기이다.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좋겠지만 정작 나는 그 영화가 개봉되더라도 보러 가지는 못할 것이다. 선혈이 낭자한 장면들이 상세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볼 수 있게 혹은 더 많은 관객을 들이려고 그 장면들의 묘사 수위를 낮추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 잔혹하고 위태로운 장면들이야 말로 조각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장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끝내며 소설가는 ‘작가의 말’에서 '파과'의 뜻을 물었지만 나에게 이 소설은 파과(破果)였다. 냉장고에 넣어 두곤 그랬다는 사실을 잊어버려 원래 모습을 잃고 만 복숭아, 조각이 떨어뜨리고 투우가 밟아 향으로만 남은 귤. 소설가 역시 냉장고 속 과일(이었던 것)에 영감을 얻어 이 이야기를 썼다고 했다. 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 과일이 얼마나 달콤했었는지. 그렇게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채 썩어간 것이 얼마나 안타깝고 아쉬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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