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세계여행
<숲속의 작은집>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찾아보니 전파를 탄 지 벌써 4년을 훌쩍 넘었다. 배우 소지섭과 박신혜가 홀로 제주도 어느 숲속에 있는 작은 집을 무대로 '행복'에 관한 실험에 참가한다는 콘셉트였다. 실험이라고는 하지만 매일 주어지는 소소한 미션(예를 들면 '갓 지은 밥으로 식사하기')을 수행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두 피실험자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자유롭게 보냈다. 이때 피실험자 B, 박신혜가 꺼내 든 것이 있었다. 번호를 따라 스티커를 붙여가며 그림을 완성하는 책.
https://youtube.com/watch?v=RWDtLurJGtk&feature=shares
당시 출근을 하거나 꼭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가는 일 말고는 도통 밖에 나가려고 하지 않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대로 괜찮나 싶던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건 위험해! 집과 한 몸이 될지도 몰라!'
하지만 시간이 흘러 스트레스가 의식을 지배한 2020년의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는 박신혜가 한 것과 똑같은 책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나는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이틀 만에 책에 실린 그림을 모두 완성했다. 스트레스가 이렇게 무서운 법이다.
스티커를 붙이는 동안 모든 신경이 집중된다. 복잡했던 생각은 잠시나마 사라지고 내 눈앞에 한 조각씩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에 설레기 시작한다.
이번 《스티커 컬러링: 랜드마크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제목이 알려주듯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테마이다. 네덜란드 엘샤우트 풍차, 파리 센 강변, 이탈리아 친퀘 테레, 중국 리장, 탄자니아 세렝게티, 경주 석굴암 등 총 여섯 군데 명소를 스티커로 완성해 나간다.
<숲속의 작은집>의 박신혜는 핀셋을 사용하지만 집에 딱히 쓸만한 핀셋이 없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맨손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경주 석굴암'편에 깨알만한 스티커가 제법 많이 있으니 욕심이 난다면 핀셋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겠다. 특히 '석굴암' 편은 완성하고 보면 꽤 근사하기 때문에 활용할 수 있는 기자재(?)를 최대한 활용해 볼 가치도 충분하다.
책을 펼치자마자 달려든 그림은 이탈리아 친퀘 테레였다. 한때 열심히 들었던 에피톤 프로젝트의 <친퀘테레>라는 곡을 흥얼거리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 장소에 내적 친밀감을 쌓았다.
유일하게 건물이나 인공물이 아닌 자연경관이 등장하는 탄자니아 세렝게티는 노을 진 배경 색감과 얼룩말 무늬 색이 어우러져 근사한 그림을 보여 준다.
계절을 따지지 않고 안락한 내 집, 내 방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은 물론이고, 요즘처럼 곳곳이 꽁꽁 어는 계절에는 누구에게나 집 밖은 춥고 위험하다. 하지만 《스티커 컬러링: 랜드마크 유네스코 세계유산》편과 함께라면 안락한 방구석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마치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에서 귀띔한 방구석 런던 여행 기술처럼!
의자에 앉아서도 아주 멋 여행을 할 수 있는데 구태여 움직이며 다닐 필요가 뭐가 있는가? 런던의 냄새, 날씨, 시민, 음식, 심지어 나이프와 포크까지 다 주위에 있으니, 나는 이미 런던에 와 있는 것 아닌가? 거기 가서 새로운 실망감 외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중략)...
그래서 데제생트는 셈을 하고 선술집을 떠나, 트렁크, 짐보따리, 대형 여행 가방, 바닥 깔개, 우산, 지팡이와 더불어 그의 별장으로 돌아가는 첫 기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집을 떠나지 않았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22쪽)
(서평단 모집 글을 보고 신청했고, {북센스} 출판사에서 흔쾌히 책을 보내주셔서 부지런히 붙이고 쓴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