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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고 May 14. 2021

로맨스판타지 대유행시대

바야흐로 로맨스판타지(이하 로판) 전성시대다. 카카오페이지에 들어가면 매일매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공작영애나 황녀를 주인공으로 한 신작이 런칭되고, 네이버웹툰도 <재혼황후>를 시작으로 <하렘의 남자들>, <곱게 키웠더니, 짐승>,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 등을 런칭하며 로판 노블코믹스 제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왼쪽부터) 네이버웹툰 <흑막 여주가 날 새엄마로 만들려고 해>, 카카오페이지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코미코 <제물 황녀님>



로판 장르 자체가 오리지널로 기획되기보다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제작되기 때문에 판권 경쟁도 하루가 다르게 치열해지고 있다. 카카오페이지는 자사 레이블인 연담과 자회사 삼양씨앤씨 등을 통해 판권을 독점 공급받고, 다른 출판사에도 투자하여 일부 작품 판권을 독점하는 방향으로 판권을 확보하는 중이다. 네이버는 웹소설 분야에서 카카오페이지보다 한 발 늦었지만 지속적으로 네이버 시리즈에 투자하면서 시리즈 독점작 유치에 총력을 기울이고, 웹툰 베스트도전과 같은 개념인 웹소설 베스트리그를 운영하며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네이버 직계약을 통해 웹툰 제작까지 함께 진행하고 있다. 현재 네이버가 유명 웹소설 자유 연재처인 ‘문피아’를 인수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도는데, 소문이 현실화된다면 네이버는 웹소설 시장에서 카카오페이지와 거의 비슷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네이버나 카카오페이지 같은 웹툰 대기업뿐만 아니라 웹툰 스튜디오나 중소 제작사도 출판사 인수 및 합병을 진행 중이다. 웹툰 출판사에서 사내에 자체 웹툰 제작팀을 만들어 자사 판권을 묶어두는 경우도 많다. 업계 흐름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로판 장르 제작은 그야말로 판권 확보 전쟁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KW북스의 웹툰제작팀 '캐롯툰', 원스토어북스와 예스 24의 합작 IP 제작 스튜디오 '스튜디오 예스원', 카카오페이지 자체 웹소설/웹툰 레이블 '연담'


업계가 로판 장르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정 소재나 장르가 유행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기업 차원에서 한 장르를 집중적으로 생산한 적이 있었나?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다. 로판 장르가 주류로 올라오기까지 많은 히스토리가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업계가 로판 장르에 열 올리는 이유는 한 가지다. ‘돈이 되니까.’

각종 커뮤니티에 ‘로판’ 카테고리가 생길 정도로 로판은 어느새 팬덤이 큰 장르가 되었다. 꼭 장르 팬이 아니어도 로판을 소비하는 사람도 많다. 심오한 내용이 많지 않기 때문에 가볍게 즐길 수 있고 그림체가 매우 예쁘기 때문이다. 로맨스를 다루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등장인물의 외모가 매우 준수하고, 판타지 장르가 가미되어 있어 현실 로맨스와는 또 다른 기발한 설정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머리 쓰고 골치 아픈 현실에서 벗어나 아무 생각 안 하고 마음껏 기분 좋은 상상을 하게 되는 편안한 장르가 바로 로판이다.



(왼쪽부터) 동양풍 로판(일명 동로판) <황후궁 체대생>과 서양풍 로판(일명 서로판) <악녀는 마리오네트> 일부


개별 작품이 아닌 장르로만 따질 때, 사실 나는 로판 장르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일단 제목부터 전개, 그림체까지 비슷비슷한 작품이 많다. 제목에는 주로 ‘악역, 악녀, 흑막, 여주, 공녀, 황후, 황녀, 남주, 폐하, 황제, 폭군’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작품은 소위 ‘회빙환’이라 불리는 회귀, 빙의, 환생 소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로판 장르의 필수조건 중 하나가 화려하고 눈이 즐거운 그림체이기 때문에 피폐물처럼 어두운 주제를 가진 작품을 제외하고 대부분 다채로운 색감을 사용해 블링블링한 느낌을 주는 편이다. 

로판 클리셰를 나쁘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다수 독자가 원할 때 특정 요소나 설정이 클리셰가 되기 때문이다. 즉 클리셰는 대중의 취향을 대변한다. 하지만 고민 없이 사용된 클리셰는 진부하고 가벼울 뿐이다. 로판 웹소설 시장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클리셰만 가득한 작품도 증가했다. 이에 따라 유사한 컨셉을 가진 작품이 웹툰화되는 일도 많아졌는데, 이런 작품은 1화 인트로만 봐서는 구분이 어렵기도 하다. 특히 로판은 독자를 유도하기 위해 초반 3회차에 후킹 요소를 배치하기 때문에 감정선이 촘촘하게 짜이거나 진득하게 고조되는 원작은 원작이 가진 맥락과 분위기가 사라지기도 한다. 클리셰가 독창성을 없애버린 것이다. 클리셰를 잘 살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클리셰에 먹히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공작부인의 50가지 티 레시피> 제작자 크레딧. 웹툰 제작 각 과정이 전부 개별 진행된다. 스튜디오에서 작가 선발부터 모든 과정을 관할한다는 점에서 작가-어시와는 관계가 다르다.


내가 로판을 선호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작품에서 대량생산 느낌이 강하게 나기 때문이다. 로판은 한 작가가 주 1회를 그리기 버거운 장르이다. 화려한 장식과 섬세한 디테일이 기본으로 요구되기 때문에 퀄리티를 높이려면 오랜 기간 세이브를 쌓거나 각색/콘티/선화/배경/채색으로 단계를 나누어 여러 사람이 협업하는 수밖에 없다. 전자는 시간이 오래 소요되며 신인 작가일수록 정도가 심해지기 때문에 후자를 택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웹툰 스튜디오는 분업 업무 방식의 결정체로, 극도로 세분화될 때는 각 캐릭터마다 그리는 사람이 따로 있기도 하다.

스튜디오와 제작사가 점차 늘어나면서 제작 속도는 한결 빨라졌지만 제작 업체에 따라 작품 퀄리티도 차이가 난다. 실력이 매우 뛰어난 작가는 한정적이고, 작품에 투입되는 인력이 많기 때문에 작품에 투자하는 금액과 퀄리티가 비례한다. 투자 비용 차이는 곧 적당한 퀄리티를 가진 로판 작품 양산화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런칭된 로판 노블코믹스 작품은 약 200개에 달하는데, 현재 제작 중인 작품이 200개가 넘는다고 한다. 파악된 개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최대 300개가 제작 중인 셈이다. 약 500개에 달하는 작품 중 서사+연출+작화가 모두 우수한 작품은 얼마나 될까? 우수함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클리셰로만 점철된 원작과 양산형 제작이 결합되는 일이 빈번해진다면 독자의 불만도 올라가지 않을까 걱정된다.




(위부터) <여왕 쎄시아의 반바지>(원작 재겸, 웹툰 새들>와 <검은머리 황녀님>(원작 엘리아냥, 웹툰 팡이)


로맨스를 좋아한다고 해서 로맨스 장르 작품을 모두 좋아하는 것이 아니듯, 로판을 선호하지 않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해서 로판 전체를 선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도 좋아하는 로판 작품이 많다. 전쟁 군인 출신 여왕이 기존 여성 복식을 바꾸는 내용으로 페미니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여왕 쎄시아의 반바지>, 자신이 좋아하는 차 문화에 몰두하고 주변에 취미를 공유하면서 불행했던 삶을 행복한 삶으로 바꾸는 공작부인의 이야기를 다룬 <공작부인의 50가지 티 레시피>, 한 컷 한 컷이 고퀄리티 그림으로 가득해서 눈이 즐거운 <악녀는 마리오네트>, 두 주인공의 귀여운 티키타카가 돋보이는 <검은머리 황녀님>, 원작과 웹툰 모두 탄탄한 서사와 짜임새, 완성도를 보여주는 <역하렘 게임 속으로 떨어진 모양입니다> 등이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로판에는 남녀 로맨스가 중심인 작품 말고도 독특한 여성 캐릭터가 돋보이는 작품이 많은데, 멋들어진 그림까지 더해지니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로판은 여러모로 K팝과 닮은 구석이 많다고 생각한다. K팝은 데뷔한 그룹 수백 개가 모두 일정 이상의 완성도를 갖추고, 시간이 지나면서 완성도의 기준이 상향된다는 점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반면 음악 시장에서 다른 장르가 설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과잉 생산된다는 점, 자기복제가 심해지는 경향이 보이며 투자금액에 따라 점차 양분화되는 양상이 나타난다는 단점도 있다. 국내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주류로 올라왔고 이제는 국내 시장을 넘어 전세계에서 사랑받는다는 점도 비슷하다. 음악 업계에서 K팝의 정체를 우려하며 끊임없이 개선을 주장하듯이 로판 장르도 건강한 존속을 위한 논의가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다.


로맨스판타지는 하나의 장르일 뿐이다. 로맨스 장르는 ‘사랑’을 다루고 스릴러는 ‘긴장감’을 일으킨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외 요소를 달리하여 수백 가지 개성 있는 작품이 만들어지듯이, 로판도 ‘사랑’과 ‘비현실’ 요소만 갖춘다면 얼마든지 넓게 뻗어 나갈 수 있다. 이제는 점차 ‘양’보다 ‘질’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이미 양적 측면에서는 300개가 넘는 작품이 런칭 대기 중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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