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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몬도 Jun 05. 2020

오늘 이혼했어요

심리학에 세월을 바치고 내 결혼생활의 문제는 풀지 못했다


결혼이요? 한번 했었어요. 저는 상담심리사예요.  
심리학 필드에서 15년을 공부했어요. 그래도 헤어지더라고요.


 헤어지기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삶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것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매일 고민하다 지금 모니터 앞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어요,


나의 큰 정체성은 심리학도였다. 10년을 공부하고, 현장에서 6년 이상의 상담사로 일했다. 대학에 진학한 이래로 심리학을 공부했고, 스무 살부터는 나와 내 주변을 엮으며 이야기를 얼기설기 완성했다. 그게 딱 서른 살의 일이었다.     


심리학을 한 이유부터 그에게로 결혼한 이유까지 핵심은 같았다. 가장 원하기로는 나라는 사람과 모부를 이해할 수 있기를. 이해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고 원망했고, 나와 그들을 가장 미워만 했다. 그렇게 이해하고 싶으면서도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 학문이라는 등잔 밑에, 누군가의 그늘 아래로 도망쳤다.           


학문의 힘을 빌려 타인과 상황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탓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나 자신에게는 합리적인 이유를 가져와 더 관대해졌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겐 ‘정말 그래선 안 되었다.’고 비난하면서, 나에게는 ‘너는 잘못되지 않았어. 단지 아팠을 뿐이야.’하고 이야기를 먹여주고 있다. 어쩌면 그때 나는 내가 체득한 학문으로 나 자신을 더 처절한 피해자로 만들고, 타인을 철저히 악인으로 만드는 데 에너지를 다 쓴 것만 같다.


십 대에는 내게 이런 방어막이 없었다. 상처 받은 청소년 시절 세상에 나갈 외투 하나를 찾지 못하다 대학에 진학하고 만난 심리학은 하늘에서 내려준 따뜻한 코트이자 동아줄이었다. 작고 어린아이가 소화하기 힘들었던 과거의 일들을 스스로에게 이해가 가능한 방식의 유년 시절로 바꾸어 주고 싶지 않았을까.     


거실에서 모여 배 깔고 아무 일도 없이 텔레비전을 보던 어린아이는 어느 순간 아버지의 폭력을 마주했다. 퇴근하고 집에 온 아버지의 힘이 어디서 그렇게 솟아나 때리는 것인지. 가만하던 가정의 평화가 일순간에 깨어지고 그 아이에겐 하나뿐인 딸을 공주님이라고 부르던 아버지라는 그림이, 힘든 일이 있을 때 함께라는 가족이라는 원초적인 최초의 집단이 사라졌다. 자신을 사랑받는을만한 존재라 여겼던 아이는 그 밤 이후 한없이 일그러진다. 이런 밤을 지낸 아이는 다음 날 아침에도 살아남아 학교도 다니고 친구와도 잘 지내야 한다. 집안의 어른들은 아무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 날밤 일에 대한 설명과 사과 없이 아이의 마음속에 컴컴한 하늘이 흘렀다.       


가족들은 심리학 공부를 오래 하는 내 앞에서 가족들에게 '왜 그렇게 밖에 살지 못했냐'하며 따져 묻지도 않았는데 어색한 마음의 찔림을 느끼는 듯했다. 문득 오빠가 ‘남들 사는 것도 다 그래.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야.’라고 이야기하질 않나, 엄마는 ‘그래, 더 심한 집도 많더라. 내가 오죽하면 너네 어릴 때 떼어놓고 나가고 그랬겠니. 그래도 너네는 자녀니까 낫지.’하며 그때의 많은 이야기를 대충 그렇게 무마하고 싶어 했다. 와중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아빠도 있다. 자신들의 시간을 그들 나름 이해한 만큼 내게 위로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사과와 사랑은 없었다.     

공부를 한다는 게 과거 일을 따져 묻는 것도 아닌데 가족들은 다들 내 앞에서 줄곧 뻘쭘하고 어색하게만 행동했다. 가장 약자였던 내게 가족의 은밀한 이야기들은 묻어두고 그냥 좀 이해하고 더는 이야기 꺼내지 말자는 꾸짖음. 모진 말들 사이 사이를 얼기 설기 메우는 변명들.

여전히 듣고 싶은 사과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몸이 닳았다.


가족과 화해하지 못한 채 심리학에서 ‘가족들이 너무 밉다. 집에서 충분히 안전하고 행복하지 않은 나는 너무 불행하다.’는 듣고 싶은 말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심리학이라는 커튼 뒤에서 나의 유년을 망친 과거 속 가족들을 한 톨도 이해하지 않고 오랜 시간 피해자로서의 합리적인 정당성을 얻었다.      


과거를 봉합하지 않은 채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대학생 졸업반이 되어 대학원으로의 진학을 계획하던 때 나는 아빠와 정 다르게 생긴 사람을 만나 연애를 했다. 연애는 가족으로부터의 두 번째 도피처가 되었다. 말을 사근사근하고 다정하게 하던 사람, 늘 아빠와 오빠 하나씩 주고 나면 가족 내 서열에 밀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닭다리를 내어주는 사람. 손이 따뜻하고 아빠와의 관계가 좋은 사람. 기념일엔 손바느질로 큰 솜 인형을 만들어주고, 내 생일엔 라디오를 녹음해서 들려주던 그런 사람이었다.



집에서는 만나보지 못했던 따뜻한 남자.       


그가 실제로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벌써 잘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현실에서 다정한 아빠를 가지지 못한 결핍으로 인해 그런 따뜻한 남자는 환상의 도피처 안에서 존재했다.

그 사람은 판타지 성에서 ‘내가 필요로 했던’ 다정한 남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심리학’과 ‘연애’라는 두 그루의 나무는 쑥쑥 자라서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아주 작은 표본의 일반화였지만 주변의 심리학자는 모두 꽤 좋은 부부관계를 맺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 마음에선 또 나의 모부를 우습게 보면서 넘어서고 싶은 마음이 움트기 시작했다.      


‘역시 공부를 해야 행복할 수 있는 거구나. 나의 모부를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해질 거야. 보란 듯이 잘 살 거야. 저들처럼 자신이 낳은 어린아이 앞에서 싸우지 않고 내 주변 심리학자처럼. 상식적이고 교양 있게 더 많이 배운 사람으로 저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거야.’     

그때의 나는 자신만만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아니까. 나에 대해서 많은 심리학 이론들을 알기에 행복해질 거라고. 긍정심리학으로 논문까지 써서 상까지 받은 성인인 나는 의기양양했다.

목소리가 작았던 시절을 보상할 요량으로 더 크게 바람을 부풀렸다.      






그런데 깨어진 자아로 심리학과 연애에 10년간 의지했던 세상이, 

우주가 사라졌다.

스물에 만난 학문이, 스물넷에 만난 사랑이 서른인 나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고등학교 이후에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고, 자격증을 따고 사회생활을 하는 모범생의 수순을 따라오던

내가 평생 계획에도 없던 일을 한 것이다.                

6년 반을 꼬박 만나고, 5개월 만에 계획에는 없던 이혼을 했다.     



심리학과 이혼.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나였다. 스스로에게도 용납되지 않는 두 이야기를 나에게 이해시키고 싶다. 나 자신에게조차 사랑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후에 상담을 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영화 <결혼이야기> , 제목은 결혼이야기지만 내용은 이혼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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