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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몬도 Feb 16. 2021

딸이 이혼했다

이혼 후 재정립한 딸과 60대 모부와의 관계를 쓰다


엄마, 나 더는 같이 못 살 거 같아. 지금 집으로 갈게.

평생 가장 하기 싫었던 일이었다. 나의 선택이 실패했다고 모부에게 알리는 일.

인생에서 이 장면을 넣지 않으려고 긴 시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어린아이였던 나의 앞에서 매일같이 큰 소리와 폭력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준 그들을 닮지 않으려 발버둥 친 지난 10년의 노력이 모래성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10년간 아득바득 공부하면서는 그들보다 우위에 서려고 했다. 온갖 이론과 심리학적 배경 지식을 동원해서 모부로서 자격 없음을 오랫동안 비난했다. 



‘심리학의 기본인 프로이트부터 애착 이론을 지나 대상관계를 공부하고, 전공 교수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고. 상담을  받는 것까지는 나의 목표였다.'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은 오랜 꿈이었다. 6년 반 장기 연애의 결말인 행복한 결혼생활보다 나의 온전한 집을 짓고 싶은 소망이 더 크고 깊었다. 신혼집에 들어간 가구와 가전도 온전히 내 취향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30대 초반 여성이 집을 나서는 가장 안전한 방법인 결혼의 방법으로 본가의 대문을 박차고 나왔다. 


좋아하는 물건들이 꽉 차있는 신혼집에서의 마지막 밤. 같이 있으면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로웠던 집에서 창밖으로 날이 천천히 밝아 오는 걸 지켜보았다. 정면으로 불행을 마주한 순간에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다음 주 출근에 필요한 옷을 챙겨서 캐리어에 넣었다. 그리고 캐리어를 끈 채 신혼집 문을 굳게 닫았다.  


운전으로 평소 20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그런데 캐리어를 싣고 돌아오는 그 날, 자꾸 정신을 잃어서 딴 길로 새고 다시 큰길로 나가면 아까 헤맨 길로 갔다. 익숙한 길을 앞에 두고도 1시간 정도 걸렸다. 한강을 낀 대교를 지날 때 여기저기서 빵빵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만 난다. 어떻게 갔는지 기억나질 않았고 운전대를 다시 잡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밥 먹고 푹 자.
신혼집을 떠나고 그렇게도 도망치고 싶었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부엌에는 따뜻한 밥과 국이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미역국. 나중에 듣게 된 알게 된 건데 엄마는 내 전화를 받고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빠에게 전화했고, 그걸 들은 아빠가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밥 차려줘’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마가 내 전화를 받고 난 뒤 동네 사람들의 눈과 입을 걱정했다는 말을 엄마 친구를 통해 전해 들었다. 내 걱정에 앞선 것이 외부인의 시선이라는 사실은 생채기가 나듯 잠깐 아팠지만 머리로 이해는 되었다. 참 내 엄마답다. 그리고 사람답다는 생각도 했다. 돌아보면 그들도 이혼한 딸을 앞에 두고 어찌할지 몰랐겠지 싶다.



내가 갓 서른을 넘은 시점이었고 모부가 채 환갑이 안되었을 때였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오빠보다 한 우리 집안 첫 번째 결혼.


 결혼식 전날 밤에 아빠와 어렸을 때를 빼고 처음으로 손잡고 신부 입장 버진로드를 함께 걷는 연습을 했다. 거실 바닥에서 잠옷을 입고서 하나 둘하나 둘. 식장에서 입장했을 때는 아빠와 연습한 대로 안되어서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데 애를 먹었다. 친구들이 그날 찍어준 입장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니 아빠는 엄청 긴장해있고 그 옆엔 환하게 웃는 내가 있었다. 긴장하는 아빠를 옆에 둔 채 나는 행복했다. 행복해 보였다. 



식장에서 아빠 얼굴을 살피진 못했다. 스냅사진 원본을 메일로 전해받고 가장 마음에 남았던 건 아빠의 이상한 얼굴이었다. 뭐랄까 아빠는 혼주석에 거만한 태도로 의자에 걸터앉아 있지만 기쁜 표정도 슬픈 얼굴도 아니었다. 엄마는 식이 진행되는 내내 연신 울었다. 



그런 가족들이었으니까.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양가 모두에게 축복받는 행복한 결혼이 아니었고 유독 가족에게는 지기 싫어하기에 내가 잘 못 지내고 있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가장 힘든 시기에도 ‘모부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버텼다. 그렇게 지낸 시간은 그 집에서의 마지막 1-2개월이었다. 진작에 둘의 관계는 어그러 졌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매일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집의 청소기를 돌리고, 먼지 청소포와 물걸레 청소포까지. 화장실 청소도 더 열심히. 반짝반짝 빛나는 신혼집은 그때의 우리 집처럼 번듯해 보였다.


 이렇게 하는 청소는 내가 알던 최선의 방법이었다. 초등학생 때, 나의 엄마도 이혼하려고 뛰어 나갔다가  돌아오고서 집에 있는 접시를 다 꺼내어 닦으며 그렇게 말했다.  ‘너네 때문에 산다.’하고- 그 말이 정말 싫었지만 엄마를 정말 정말 좋아하던 나는 그 말을 오랫동안 믿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지내는 어느 밤. 엄마는 내게  ‘엄마가 잘 사는 모습 못 보여줘서 미안해’란 말을 딱 한번 한 적 있다. 나의 결혼생활이 깨진 이유가 온전히 이 들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탓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서 흔하게 할 법한 ‘아니야.’란 말로 희석해버리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엄마가 한 말의 최선이었다. 친구네는 엄마가 대신 윽박지르고 싸워 주었다고 했을 때 속으로 남의 집 엄마라는 모델을 부러워했지만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꾹꾹 참고 저 말을 덮고 누웠다



퇴근하고 상담받고 온다고 말하면 엄마는 ‘걔가 받아야지. 왜 네가 받냐’고 매번 물었다. 상담받는 게 나한테 좋은 거라고 그때마다 설명해도 엄마는 ‘그러면 네가 힘드니까’라고 말했다. 이런 어색한 대화 대신에 ‘엄마 오늘 시금치 무침 맛있다.’고 하면, 내가 맛있다고 하는 나물반찬을 내 쪽으로 밀어주며 밥을 더 먹으라고 하는 엄마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아직도 모르겠다.








이혼한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모부와 같이 사는 일이 갑갑해 제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한 결정임에도 걱정만 하는 그들 앞에서 제 때 울 수 없었다. 헤어지고 다시 돌아온 본가를 떠난 채 

제주에 내려가 있는 기간은 60대 모부에게도 슬픔을 소화시키는 시간이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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