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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몬도 Jul 08. 2020

본인의 우울증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관계의 화분을 깨고 나를 만나다


오랜 연애를 하고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참 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우리 집에선 오빠보다 먼저 하는 혼인이라 부모님 손님도 무척 많았습니다. 또한 각자 서로에게 첫 연인인 데다 교제 기간이 길어 결혼을 축하해주러 온 지인이 많았습니다. 오랜 기간 같은 사람과 교제하는 연인의 결혼식이기에 그들은 각별한 마음을 갖고서 먼 걸음을 마다하지 않고 와주어 식장이 북적였습니다.


결혼식은 우리 가족이 좋아하지 않는 교회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날의 주례는 신부의 세례를 도와준 목사님이 해주었습니다. 그 날 주례 내용은 긴장된 마음에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보면 주례를 부탁하면서도 싸우는 예비부부의 이야기를 하였고 하객 모두가 웃었습니다. 하지만 예쁜 드레스를 입고 신부화장을 한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도무지 웃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오랫동안 아꼈던 목사님은 주례를 부탁하면서도 싸우는 예비부부의 모습에 따로 전화를 주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결혼을 그만두는 거 어떻겠니? 기도 같이 해줄게”


그때의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나의 결혼 예정 소식을 다 알고 있었기에 그만 둘 생각은 해본 적 없었습니다. 나를 그 사람보다 훨씬 오랫동안 봐오신 분의 말씀이라 가끔씩 신경은 쓰였습니다.

하지만 그저 마음에 작은 돌멩이가 얹어진 채로 해오던 결혼 준비를 했습니다. 아무래도 해오던 걸 하는 편이 포기하는 결심에 대한 용기보다 훨씬 가볍지 않았을까요


다시 주례로 돌아가면, 싸우는 이야기 이후엔 길어진 설교로 모두가 힘들어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혼잡한 주차장 때문에 출차에만도 1시간이 넘게 걸린 것입니다. 그게 너무 지겨워서 사람들은 주례 속 예비부부의 다툼은 잊었을지도 몰라요.



소중한 토요일을 반납하고 멀리서 와준 이들에게는 결혼식 이후의 다음 스텝처럼 고마움을 표현했어야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남들 하는 건 다했던 그 해 봄, 여름으로 기억되네요.

그때마다 친구들은 나의 얼굴에 대해 꼭 한 마디씩 했습니다.


“근데 너 왜 얼굴이 결혼 때보다 안 좋아졌어?”


이 얘기를 여러 모임에서 한 세 번쯤 들었습니다. 두 번 즘 들었을 때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머리가 멍해졌고 발은 무겁게 끌렸죠.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의 눈은 속이질 못했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상담 공부를 함께 한 친구나 중학교 동창인 친구도 내게 같은 말을 했습니다.


 집 안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던 삶은 밖에선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원가족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부가 매일 같이 싸우던 IMF 시절에도 나는 감정을 숨기고 학교에 나가 살아남았던 것처럼, 모든 문제에서 갈등은 계속됐죠. 매일 같이 밤새 싸우고 울면서 간신히 회사에 나갔으니 나의 안색을 살피진 못했죠.

점점 웃음이 줄었지만 스스로는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던 그때, 친구들에게 얼굴의 그늘을 들킨 뒤 나의 현실을 늦게 자각했고 더 많이 울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결혼 후에도 헤어지는 게 흉도 아니라지만 그건 남들 말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한쪽 눈을 감은 채 작은 화분 속에 살았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니까 ‘다시 과거로 간다면’하는 상상 해보지만 서른의 나는 기어코 그 결혼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화분의 시선에서 줌아웃을 하면 숲에 있는 여러 식물 친구들이 있을 수도 있고, 지금이라면 그 화분을 깨부수었을 것입니다. 처음 그를 만났던 스물넷에는 그 사람과의 연애라는 화분은 내게 참 넓은 도피처였습니다. 하지만 서른에도 같은 화분이었고 나의 마음의 크기에는 충분치 않아 자꾸만 팔과 다리를 구겨 넣어야 했습니다.




글을 쓰며 모니터 앞에 마주하는 일도 이렇게 오래 걸렸습니다. ‘내 인생이 망했다.’라고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정말이지 용기가 나질 않았죠.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아빠가 있는 원가족으로부터 정반대의 사람에게로 멀리 도망쳐왔으니 반드시 그리고 분명히 행복했어야 했어요. 그런 모부를 깔보는 마음에 심리학이란 공부도 더 많이 했는데 하물며 그들처럼 사는 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작아졌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시간이 쌓여 그 시절 세상이 온통 뿌옇고 흐렸습니다. 어느덧 날이 좋은 가을이 오고, 엄마 집에 들러 패딩을 챙겨간 걸 보면 겨울이었는데 기억이 흐릿합니다. 자주 울었고 술을 한 잔도 못 하는 내가 퇴근할 때면 집 앞 편의점에 들러 하루에 1번씩 맥주를 사서 들어갔습니다.


서로에게 독기 가득한 말들은 늘 준비되어 있었고, 각자의 약점을 가장 잘 파고들었습니다.

같이 산 이후. 첫 부부싸움부터 상담받으러 가자고 해보았지만 그는 때마다 거절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싸운 날 밤, 그에게 상담에 함께 갈 건지 물었지만 더 칼을 간 대답으로 돌아왔습니다.



‘네가 문제니까 네가 가면 되겠네’

그 말을 듣자 순식간에 머리에 번개가 일고 이 구덩이에서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곳이 구덩이인 줄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모부 앞에서 창피함을 얻고 싶지 않았던 자존심으로 최선을 다해 버티던 끈이 끊어진 거죠.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영화 <메기>



내가 찾은 화분이 틀릴 리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 이제는 더 이상 구덩이를 파볼 것 없이 진흙 안에서 발을 꺼냈습니다. 1분, 1초의 미래를 함께 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워서, 다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는 시점에 화분을 깨고 나왔습니다. 오랜 시간 움크려온지라 어디를 디뎌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나의 두 발을 관계라는 화분에서 꺼내어 지표면 위에 올려놨습니다.



 상담 때마다 내담자들의 심리검사 결과를 해석하고, 상담 진행 초기에 주된 정서를 파악하는 게 나의 일(work)인데 내 일이 되자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우울증의 진단기준을 암기한 나의 지식은 무용했죠. ‘우울하다’와 ‘불행하다’라는 두 문장으로 입술을 오므리며 발음하게 되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우울함을 인지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어느 때보다 상담이 필요한 시기였음에도 막상 다시 내담자가 되어 상담소로 가기 싫은 마음이 튀어나왔어요. 그럼에도 이런 마음의 모양이 병을 키우는 일인 건 기억하고 있는 전문가라 전에 상담받았던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가장 빠른 상담시간으로 예약 원한다고요. 위급하니 1주 2회 상담으로 요청합니다. 하고



추후 상담을 하러 오랜만에 내담자가 되는 날, 코끝이 시렸습니다.

퇴근하고 오랜만에 상담소에 다녀오고서 센터에 용기 내어 온 나의 내담자들은 선배가 되었고,

그들이 센터를 찾기까지 겪은 어두운 시간을 가만히 떠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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