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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사공이 Oct 17. 2023

변기 쇼핑이 간절한 이유

인간의 배설과 그 의미

 가끔 랜선집들이라는 명분으로 SNS에 공개되는 타인의 공간을 엿본다. 초대는 귀찮지만 집 자랑은 하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도 이해하고, 두루마리 휴지 한 롤 제공하지 않고 남의 집을 마음껏 구경하는 게 재미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고급 호텔처럼 크고 번쩍이는 화장실이다. ‘저런 화장실에서는 글도 쓸 수 있겠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드는 화장실에서 우리는 참 많은 행위를 한다. 손을 씻고, 화장을 지우고, 정성스럽게 목욕도 한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행위는 단연 변기의 사용이다. 개인적이고 위생적인 배설을 도와주는 공간, 화장실. 현대인에게 그것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참 의미가 남다른 공간이다.


현대인에게 화장실은
의미가 남다른 공간이다


인도에서는 아직도 5억 명 이상이 화장실이 없는 집에서 거주한다고 한다. (14억 명의 인구를 감안해도 굉장히 낮은 화장실 보급률이다) 그들은 사람의 대변을 불길하게 여겨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집에 화장실이 있더라도 야외에서 대변을 보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노천 용변 문화를 퇴치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화장실 1억 개를 지어주기도 했으나 인도인들은 여전히 ‘큰 볼일’을 밖에서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뒷간이 집 안으로 들어온 지 꽤 됐다. 요즘 새로 짓는 아파트는 20평 대도 대부분 화장실이 2개이다. 가족 수만큼 화장실을 두는 집도 있는가 하면, 게스트용 화장실을 따로 만들어 놓는 경우도 흔하다. 은연중에 화장실이 많을수록 잘 사는 집이라는 인식도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남편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빈손으로 상경해 고시원에 살다 화장실 2개짜리 집으로 이사했으니 이 정도면 성공한 거 아니야? 난 그럴 때마다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리액션한다. 남편에게 화장실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면서.



어느 날, 거실 화장실 변기 하단에 작은 균열을 발견했다. 혹시 저 틈으로 오물이 새어 나오는 건 아닐까, 끔찍한 상상이 이어진다. 남편에게 당장 변기를 바꿔야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남편은 변기 외부에 생긴 작은 균열 때문에 당장 문제가 될 건 없다며 초연했다. 그 후로 화장실을 사용할 때마다 변기의 밑동을 째려본다. 괜히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변기 사용 직후 주변을 물청소하는 결벽증 초기 증세가 나타났다. 이윽고 마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안 되겠어. 당장 변기 쇼핑을 하러 갈 거야!’ 기능상 문제는 없더라도 깨진 물건을 집 안에 두는 건 풍수적으로도 좋을 게 없다. 이 주장을 바탕으로 남편과 ‘변기 교체의 건’에 합의를 봤다.


문득, 마음 놓고 편안히 배설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는다. 그리고 우리가 주기적으로 배설해 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변기에 앉아 장내 숙변과 방광의 소변을 내보내듯, 때론 가슴에 쌓인 감정의 노폐물을 시원하게 쏟아내야 한다. 이때 언어는 좋은 도구가 된다. 어떤 논리도 우아함도 없이 배설하듯 떠들어대는 그런 말. 그걸 우리는 수다라고 부른다. 제때 화장실을 가지 못하면 변비나 배뇨 질환에 걸리는 것처럼 수다를 참으면 스트레스성 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인도인들이 노천 대변을 보듯 아무 데서나 ‘배설의 수다’를 떠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깨끗한 화장실처럼 ‘적당한 장소’가 필요하다. 직장인들의 대나무숲이 되어주는 커뮤티니가 바로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깨끗한 화장실처럼
'배설의 수다'가 허용되는
적당한 장소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나는 때때로 한 친구를 만나 배설에 가까운 수다를 즐긴다. 주로 선택하는 배설의 장소는 동네 아줌마들(아이 학교의 학부모들), 남편과 그의 식구들을 마주칠 확률이 없는 혼잡한 제3의 도시다. 이를테면 강남역 같은 곳이다. 그곳의 소음은 우리에게 안전하고 자유로운 수다를 허용한다. 물론 깨끗한 화장실도 제공한다. 오전에 만나 장장 9시간을 내리 떠들다 늦은 밤 목이 쉬어 귀가한 적도 있다. 양측의 남편들은 두 아줌마의 마라톤 수다에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우리의 수다가 놀라운 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의 배설이라는 것이다. 너무 똑같아서 힐링이 되는 거울치료 수준의 대화가 8할이다. 암묵적으로 배설의 수다를 약속한 사이이므로 서로를 평가하거나 비난하지도 않는다. 스트레스가 임계치에 도달해 급 수다가 마려울 때는 긴급 만남도 불사한다. 그런 날은 서로가 있어 다행이라며 클로징 멘트를 날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헤어진다.


인간에게 배설은 중요한 행위이다. 부정적 감정을 제때 배설하지 못하면 마음에 독기가 쌓인다. 미처 배설하지 못한 원망과 시기심, 분노가 날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내 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조만간 금이 간 변기를 바꾸고, 친구에게 연락해 봐야겠다. 강남역에서 만나자고.


#글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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