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T, 인생의 비상구 유도등을 찾아서
대학시절, 학교 인근에서 자취를 한 적이 있는데 원룸촌에 사는 같은 과 친구들과 마치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다. 밤이고 낮이고 거의 모든 시간을 공유했으며, 시험공부나 과제도 늘 함께 했다. 그런데 시험기간이나 중요한 과제 제출일만 다가오면 한 밤 중에 홀연히 사라지던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그 친구가 어디에 있는지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찾지 않았다. 바로 원룸촌 앞 오락실, 펌프 위. 친구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웃기지 마라! 제발 좀 가라! (추억의 명곡, 노바소닉의 '또 다른 진심'이 음성 지원 되는가?!)
그녀는 시끄러운 음악이 터져 나오는 펌프 기계 위에서 힘차게 발을 구르고 있다. 현실을 벗어나 자신만의 비상구로 힘차게 도피하고 있던 것이다. 처음엔 마감이 임박한 과제를 마치지 못한 친구가 어디 가서 울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 같이 원룸촌 곳곳을 찾아 헤맨 적도 있다. 그러다 오락실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화실표를 밟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중요한 시간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때 그 친구는 온몸으로 '현실도피'라는 단어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학생활 내내 그녀의 현실도피는 주기적으로 이뤄졌고, 펌프 위에서 실컷 뛰다 내려온 친구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살면서 정말 딱 도망치고 싶다 느낄 때,
난 어디로 가야 할까?
적당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커렌시아' 도로명 주소까진 아니더라도, 어둠 속에서 초록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비상구 유도등 정도의 위치는 알고 싶다. 그 길을 따라가면 뜨거운 불길 걱정 없이 편안히 숨 쉴 수 있는 바깥세상이 나온다는 믿음. 그 믿음만으로 삶은 한 결 가벼워질 것 같다.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비록 현실도피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나를 짓누르는 부담과 책임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잠깐의 현실도피. 다들 어디로 하는 걸까?
누군가는 퇴근길 에어팟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속으로 빠져들며 무너져 내린 마음을 잊는다. 누군가는 SNS에서 무한 제공되는 귀여운 동물영상을 보며 입꼬리 자동승천 시스템의 버튼을 누른다. 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뭐 해?'라고 묻는다. 사방이 컴컴할 때 우왕좌왕 할 것 없이 바로 달려갈 수 있는 곳.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도 그런 비상구가 아주 없진 않았다. 여건이 된다면 곧장 침대에 몸을 던져 잠으로 빠져드는 편이고, 그게 어렵다면 짤막한 호흡의 편안한 에세이나 시집을 읽었다. 그런데 요즘, 그것이 어려울 때가 많다. 몸은 집에 있어도 집안일을 쌓아두고는 맘 편히 침대로 향하기 어렵다. 가족의 방해를 받지 않는 독방 타임도 부족해 예전처럼 독서도 충분히 하지 못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휴대폰에 일기장 어플을 다운받아 쏟아지는 생각들을 그대로 키판에 눌러본 적이 있다. 한 풀이를 하듯 문장들을 쏟아내고 나자 약간의 편안함이 찾아왔다. 일기장이 나의 한숨을 숨겨두는 일종의 현실도피처가 된 것이다. 또 있다. 일주일에 두 번, 평일 저녁에 남편과 아들의 저녁밥을 차려놓고 카페 알바를 나가는데, 공복도 아닌데 이상하게 후련하고 가뿐하다. 집에서 카페까지의 거리는 1km 남짓이라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그 길엔 보이지 않는 나만의 비상구 유도등이 켜져 있다. 공식적이고 주기적인 현실도피다.
현실도피라고 하면 적어도 급히 비행기 티켓을 끊거나, 베프와 오픈카를 빌려 타고 델마와 루이스라도 돼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인생의 답답함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이 꼭 요란하고 거창할 필요는 없다. 일상의 곳곳에서 반짝이는 나만의 비상구 유도등을 찾아보자. 어쩌면 언제, 어디서나 감당가능한 현실도피가 가능할지 모른다.
#글모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