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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사공이 Aug 11. 2021

패션은 알아봐 줘야 맛이지

스타일이 몹시 주관적일 때 벌어지는 일

 2000년대 중반 케이블채널의 패션 프로그램 작가로 일을 한 적이 있다. 시상식이나 크고 작은 행사에 초청받은 스타나 셀럽들의 의상을 낱낱이 분석하는 코너가 늘 인기였다. 워스트 드레서, 베스트 드레서로 명명된 그들은 언제나 핫이슈였고, 사람들은 그들이 착장 한 모든 것을 궁금해했다. 녹화 주에 대형 영화제라도 열리면 작가들은 초비상이었다. 우선 가장 화제가 된 의상의 주인공들을 리스트업하고, 그들이 걸친 드레스와 슈트, 슈즈와, 클러치, 액세서리의 브랜드를 찾아야 하는 미션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보통은 스타일리스트와 매니저에게 연락을 하여 프로그램을 밝히고 정중히 정보를 묻는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오래 지속되면서 워스트로 여러 번 선정되거나 자신들의 스타일을 평가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스타와 그의 스텝들은 작가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면 작가들은 다시 그들이 입을만한 브랜드의 홍보팀과 매장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정보를 캐내려 애를 쓴다. 스타가 자신들의 브랜드를 입고 레드카펫을 밟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브랜드는 친절히 응대해주며 우리가 궁금해하는 모든 정보를 알려준다. 그럼 우리는 방송을 통해 '00 배우가 입은 드레스는 △△브랜드로 약 500만 원대 제품이라고 합니다'라는 식의 정보를 방송을 통해 제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보를 찾아내는데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더욱이 매주 이런 식으로 수십 종류에 달하는 스타들의 착장 정보를 모두 알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디자이너도 감탄할 막내작가의 패션열공

결국 영민한 막내작가는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하이앤드 패션 하우스의 룩북을 구해 탐독하기 시작했고, 매 시즌 국내외 다양한 브랜드의 컬렉션을 눈에 익혔다. 체크무늬만 봐도, 빨강초록 띠만 봐도, 얼기설기 짜인 트위드 소재으로도 알 수 있는 명품 브랜드도 있지만. 스타일만 보고 단 번에 알 수 없는 브랜드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막내작가는 영상 속에서 레드카펫 위를 걸어오는 어느 여배우의 착장을 보며 홀린 듯 읊조렸다. '저 옷 ** 같아요! 저 구두는 **의 이번 컬렉션에서 본 것 같아요' 그리고 해당 브랜드의 매장으로 전화를 걸어 그저 순수한 잠재 고객 인척 이번 어느어느 행사장에서 배우 000이 입은 드레스가 이 브랜드가 맞는지 확인을 했다. 전화를 끊고 난 막내작가는 우리를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막내를 향해 숨죽여 엄지를 헌정했다.


세상은 넓고 비싼 옷은 많다!

그렇게 몇 년간 몇 개의 시즌으로 호황을 누리던 그 프로그램 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나는 그 프로그램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세상은 넓고, 비싼 물건은 참 많으며, 이 모든 것을 구입할 여력이 있는 부자들도 참 많다는 것을. 당시 그 방송국이 청담동에 있기도 했고, 가장 먼저 신상을 만날 수 있다는 이유로 청담동, 압구정 일대의 편집샵들을 찾아가 트렌드를 소개하는 코너를 주로 촬영을 했었다. 20대였던 나는 지금보다 유행에 더 민감했고, 패션 프로그램을 하는 작가라는 프레임에 갇혀 유행템을 놓치지 않고 구입하는 편이었다. 물론 월급으로 감당이 되는 적절한 가격선에서. 크고 웅장한 유명 편집숍들은 대부분 촬영 때문에 처음 가보는 경우가 많았고, 그곳은 내가 구입한 유행템의 10배, 100배 비싼 제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야말로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때때로 위화감을 느끼긴 했지만 참 재밌는 경험이었다. 물론 지금은 마땅한 재력 없이도 으리으리한 매장에 서슴없이 들어가는 편이며, 원하는 유행템이 고가라면 그들만의 세상이 아닌 온라인 세상에서 직구로 구입하고 있다.


어머, 이건 사야 해!

쇼핑 중 내 영혼의 조각을 만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패션 프로그램을 하기 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옷을 참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도 용돈을 모아 마음에 드는 벙거지 모자를 샀을 정도다. 수십 년간 이런저런 스타일을 참 많이 도전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하다. 사실 조금 특이하고 과한 아이템을 좋아한다. 좋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돈을 지불하여 구입하며, 남들의 시선이야 어떻든 잘 입는 편이다. 이런 나의 스타일을 가장 기이하게 여기는 건 남편이다. 호피무늬를 좋아해서 여러 개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데, 남편은 전생에 호랑이가 아니었냐며 놀려댄다. 호피라고 해서 다 같지 않으며 그 카리스마 있고 창조적인 패턴은 죽었던 스타일로 살려주는 마력이 있다. 호피무늬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이런 나의 몹시 주관적인 스타일이 누군가의 취향을 저격하는 날이면 정말 상대도 나도 기분 좋은 상황이 벌어진다. '이 옷 뭐야 너무 이쁘다!'. '완전 내 스타일~', '이거 나도 갖고 싶었어!' 등등의 대화가 오가며 호피여사님들의 우정은 두터워져 간다. 더 희열을 느낄 때는 같이 쇼핑을 하는 친구나 심지어 나 없이 쇼핑을 하던 친구가 '이거 니 옷인데?' 하며 옷을 보여주거나, 사진을 찍어 보내오는 일이다. 대부분 진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들에게 내 스타일이 각인된 것이다. 꼭 튀는 스타일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누구나 알 법한 명품브랜드를 입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블랙을 고수하되 독특한 디자인을 선택하는 사람, 자연적인 소재의 옷으로 편안한 핏을 추구하는 사람, 어떤 옷에는 그에 어울리는 빨간 구두를 매칭 하는 사람까지. 모두 주관적인 스타일을 유지하며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 다운 패션'으로 그이를 알아보게 한다. 멀리 걸어가는 태만 보아도 그 사람이다! 알아볼 수 있는 대체 불가 개인적 스타일.


트렌드를 만드는 자기만족형 의복생활

체형과 얼굴형, 헤어컬러 등을 고려한 스타일링 팁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어울리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이 다를 때 어떤 쪽을 선택하는 게 나을까? 개인적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과감하게 선택하고 끊임없이 추구하길 추천한다. 그러다 보면 그게 자신의 스타일이 될 것이고, 많은 이들이 그것으로 나를 알아봐 줄 것이다. 끌리는 대로 마음대로 입다가 패션테러리스트 소리를 들으면 어떡하냐고? 그 테러리즘(!)적인 패션으로 남들이 당신을 알아보면 그것 또한 훌륭한 일 아닐까? 굉장히 마른 남성인 김 모 씨는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를 즐겨 입었다. 체형 커버 용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생활용도 전혀 아니었다. 그냥 자기가 좋아서였다. 하와이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있는 건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약간은 편향적인 그의 스타일을 보고 사람들의 호불호가 갈렸다. 하지만 어떤 해 여름에는 그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가 유행을 했고, 여러 사람이 그 옷을 즐겨 입었다. 그러자 왜 다들 김 모 씨의 옷을 따라 입는 거냐며 하와이안 후발주자들을 놀려댔다. 입어본 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화려한 셔츠는 가볍고 시원했으며, 청바지에도 면 반바지에도 잘 어울리는 의외로 매력적인 전천후 아이템이었다. 졸지에 패션에 관심 없던 누군가는 여름 휴가용 하와이안 셔츠를 하나 구입해 보려 한다며 김 모 씨에게 적절한 구매처를 묻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계속 이 옷 저 옷 대보고 시도하다 보면 남들도 납득할 정도로 옷을 잘 입게 된다는 것이다. 패션 전문가들에게 옷 잘 입는 법에 대해 물으면 대부분 '무조건 많이 입어봐야 한다'라고 대답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옷을 정말 잘 입게 됐는데, 계속해서 사람들이 납득을 못한다면? 그건 아마도 당신이 시대를 조금 앞서 가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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