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 Dec 24. 2023

완전 원고를 보내고

9시까지 늦잠 자고 싶었는데 습관처럼 날이 밝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남편은 내 귀에 대고 코를 골고 있고, 뒤척이는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있던 루피와 보아가 침대로 올라왔다. 루피는 날 보고 멀뚱히 앉았길래 이불을 들쳐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이불 속으로 들어왔고, 보아는 얼굴에 사정없이 뽀뽀를 하며 콧구멍까지 탐을 내 코를 막았더니 몇 번 손을 치우려 시도하다 포기하고는 내 팔을 베고 누웠다. 매일의 반복이다.


언젠가 10년 차 동화 작가인 S 언니가 내게 원고는 얼마나 진행되어가느냐 물은 적이 있다. 언니는 이렇게 저렇게 대략적인 내 답을 듣고 "네 가슴속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나 보다."라고 말을 했더랬지. 나도 미처 알지 못했던 걸 이렇게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 그래. 꽁꽁 담아만 두었던 내 가슴속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그렇게나 많았던 거구나.


그동안 차마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꺼내 구석구석 살펴보며 그 과정은 비록 만만치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무척 홀가분하다. 이 마음이 내일은, 다음 달은 또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지금은 그러하다.


6개월간 써 온 원고를 마무리했다. 다시 말해 완전 원고를 털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어제 출판사 대표님과 편집장님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막히는 외부 순환도로에서 참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투고를 하고, 기다리고, 계약을 하고, 원고를 쓰고, 그리고 완전 원고를 털기까지의 시간들. 거기엔 떨림, 긴장, 설렘, 벅참, 괴로움, 슬픔, 안도, 기대, 후련함, 아쉬움… 그리고 짧게 스치고 지나갔던 더 많은 감정들이 있었다. 그 모든 순간의 기저엔 엔 확신이 있었다. 내 글이 기깔나게 좋다거나, 누구에게라도 재미있게 읽힐 거라거나,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거나 하는 확신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만,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고 사람에 대한 확신. 서로의 손을 잡아 준 출판사에 대한 확신이랄까.


오래전 업무 스트레스가 심해 이직률이 높은 고객센터에서 10년간 일을 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람이었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하는 사람이 좋다면 이겨낼 수 있다. 역시 반대로 사람 때문에 버티기 힘들 수도 있는 거고. 의심하는 순간마다, 불안해하는 순간마다 확신을 준 사람들. 덕분에 이렇게 완전 원고를 터는 순간도 만나게 된 거겠지.


비웠으니 채우셔야죠,라고 어제 대표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퇴고와 편집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말씀처럼 당분간은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예능도 보고 엉망이 된 집안일도 하면서 꾸역꾸역 뭐라도 채워 넣어야지. 그러고보니 크리스마스다. 완전 원고는 내가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구나!


+

쓰고 보니 뭔가 조금 거창해 보이는 것 같은데, 원고 털어서 일단은 좋다는 얘기다. :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