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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ㅕㅇㅇㅣ Aug 04. 2020

빛이 마음을 통과할 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서윤후, 『햇빛세입자』(알마, 2019)

잠들기 전, 머리맡에 두는 빛에 대해 생각한다.


I사의 스탠드 조명, 아쉽게도 밝기는 스탠드 목을 구부려 겨우 조절할 수 있다. 며칠 전부터는 갓의 방향을 누운 자리와 정반대에 두기 시작했다. 빛이 천장 위로 퍼져 이젠 한밤 중에도 편히 잠들 수 있게 되었는데,


수면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암막 커튼이나 수면안대가 도움이 된다지만 내 수면에는 딱히 소용이 없다. 눈을 감으면 세상은 제일 어두울텐데 더 많은 빛을 차단하기 위해 도구를 이용한다는 게 이해가 잘 되지 않고, 감은 눈 위로 칠흑 같은 어둠이 한 번 더 입혀지는 일은 왠지 불안을 부른다. 한 줄기의 빛이라도 들어오는 방 안에서만 잠을 청할 수 있다. 내가 방문을 열고 자는 이유도 그런 거지.


8. 햇빛세입자는 외부와 내부를 잇는 최초의 통로가 됩니다. 일시적으로 열리는 시간이 있으므로, 그 시간을 즐길 것을 권장합니다. (74)


10. 햇빛세입자가 드나드는 자리에서부터 집은 유연해집니다. 암막 커튼으로 입장을 막았다면, 지금 당장 열어 젖히세요. 집에도 기분이 있다면 햇빛이 드는 자리에서 턱을 괴고 싶어 하니 그 게으름을 햇빛 속에 놓아주세요.(74)




ⓒ yes24




빛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볼까.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에게서 빛이 보인다는데, 그랬던 적이 딱 한 번 있고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날은 당번이었다. 출석부와 조회시간에 필요한 사항을 챙기고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교무실에 앉아 있던 한 선생님이 나를 불러세웠다. 그는 학생주임보다 무섭기로 소문난 사람이었고, 허리춤을 접은 치마자락을 밑으로 내리며 긴장한 채로 다가갔다. 선생이 말하길,


"너, 잘 안 웃더라?"

"네?"

"표정이 늘 굳어 있더라고. 웃어, 스마-일."


(지금은 그런 효과음이 흔치 않지만)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어린 아이가 "스마-일!"하는 그 목소리, 그걸 비슷하게 흉내내더라.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악명 높은 사람이 그랬거니와는 별개로, 조용한 학생 축에 속했던 나를 잘 기억해두었다가 건넨 첫마디치곤, 귀여웠다. 선생이 엄마보다 두 살이 많고 나의 동생과 동갑인 아들이 있다는 사실만 빼면, 내가 감히 귀여워해도 될 것 같은 인물처럼 보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 다음 날 우리반 생활국어 시간을 전담한 그가 교실 미닫이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오는데, 맙소사… 그가 문을 열자마자 강렬한 빛이 교실 안쪽으로 쏟아졌더랬다. 우리반이 아무리 옥상 테라스 입구와 마주보고 있었다지만, 내가 마주한 빛의 양은 바깥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아, 이거구나… 왜, 그런 거 있잖아. 드라마에서 보면 말이야, 첫눈에 반한 주인공이 목격하는, 상대의 뒤통수로부터 번지는 하얀 빛 같은 거. 그날부로 화요일 4교시, 점심시간 직전의 45분을 가장 기꺼워하였고, 맨앞에 앉은 친구들과 자리를 바꿔가며 그를 가까이에서 보았다. 화요일 점심시간만큼은 맛없는 반찬이 나와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사랑은 두 사람만 아는 유머 같아요. 그러니까 수백 명의 사람들 속에 있어도, 그 둘만 아는 유머를 알아보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을 수 있는 거요.(58)


선생은 과연 기억하고 계시려나. 내가 선생을 찾아가면 그때를 떠올리며 우리가 웃을 수 있으려나. 그날, 빛이 너무 많이 쏟아져서,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사랑에 빠지는 게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그뒤로 어느 누구에게도 그날 만큼의 빛을 볼 수 없어, 나는 사랑에 실패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훈데르트 바서,〈은빛 나선 Silver  Spiral〉ⓒ Google




그곳을 떠나와 숙소에 있을 때에도, 자꾸만 그의 얼굴과 작품, 그가 설계한 건물이 아른거렸다. 사로 잡혔다는 말을 처음으로 몸소 실감했다. 나는 아른거린다는 느낌이 아름다움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사랑을 예감했다. 계속 생각난다는 것, 아른거리는 신호가 나에게로 쏟아지는 것은 사랑의 암호이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참을 수 없어 다음날 여러 일정을 미뤄두고 그가 디자인했다는 슈피텔라우 쓰레기소각장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17)


서윤후 시인은 사랑이란 걸 예감할 때 '아른거림'을 감지한다고 썼다. 아른거림이 조금 더 깊어지면 궁금증이 된다. 지금 무엇을 하는지(혹은 무엇이 되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하는 일. 그 사람만 생각하면 안 먹어도 배부른데, 괜히 밥을 챙겨먹으면서 "밥은 먹었으려나"하고, 식사를 마치고서는 "오늘은 무얼 먹었으려나"하고, 그릇을 부시면서는 "지금 무얼하려나" 하며 온종일 상대의 일상을 한껏 상상하는 일. 운이 좋아 그와 SNS 계정을 팔로우하는 사이라면, 방금 업로드한 사진을 보고는 "오늘도 맥주를 마셨네!" 하며 텅 빈 냉장고 문을 괜히 열어보는 일.


함께하지 않은 사랑을 기다리는 일이 아프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혼자 들끓으며 좋아하는 일도, 결국 오랜 기다림으로 둔갑하는 순간 자신을 내리치기 쉬운 둔기가 된다. 같이 있지만 옆에 없는 것 같고, 옆에 있지만 계속 기다림이 끝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는 사랑을 의심한 적도 있었다. (71)






빛과 맞닿아 있는 꿈 하나를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방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무로 된 책상과 의자가 있고, 천장과 가까울 정도의 크나큰 책장 두어 개, 방 한 켠 코너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진 작가의 작품이 내 키 만한 액자로 세워져 있는, 그런 방이요. 아, 빛이 드나드는 창이 나 있으면 더 좋겠죠. 그런 창이 있다면 그곳 앞에 책상을 둘 겁니다.


책상은 나의 대자연의 미니어처이자, 내가 잘 보이는 손거울이기도 하다. (140)


여덟 번째 책상 일기를 언제 쓸지 모르겠다. 이 책이 나올 때쯤엔 블로그에 수십 번째 책상 일기가 적혀 있을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책상 일기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모르니까 해보겠다는 말, 그런 무용한 선언 속에서 알게 되어 할 수 없는 것과 계속 궁금해지는 것이 구분되었다. 모니터가 뿌옇게 보일 때면 나는 모니터를 닦는 게 아니라 안경알을 차분하게 닦고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이곳이 나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면서. (142)


시인의 블로그를 팔로우해두고, 일명 '책상 일기' 연재를 지켜봐온 나는 이 글이 참 반가웠다. 가끔씩 써둔 글을 모두 비공개해두면 어쩐지 비밀이 생긴 것 같고, 사진과 함께 단상들이 올라오면 그의 글을 볼 수 있는 오늘이 감사히 여겨졌다. 정갈한 하얀 책상이 사진으로 찍혀 올라오는 날, 나도 책상이 갖고 싶어 졌다. 단골 카페로 와 글을 쓰는 지금, 책상이 절실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다 읽고, 훈데르트 바서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의 시집들을 차례로 꺼내 읽었다. "내가 여름을 말하면 너는 바다를"(김소형) 생각하는 사람. 그가 쓴 시에는 여름, 특히 해변의 이미지가 쏟아지곤 하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빛과 닮아 있는 것 같다. 여름을 좋아하는 한 사람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사랑. 여름이 다가오면 '서윤후'라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고, 그만큼 그는 여름에게 무엇을 맡긴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그가 쓴 시 중에 나는 이 시를 제일로 좋아한다. 전문을 옮기며 마친다.


 *

 해변에 버려진 것 중엔 내가 가장 쓸모 있었다

 버려진 사람들이 잃은 것을 대신해 다시

 버려진 사람을 줍는 세계에서

 우리의 수도는 어느 쪽이었을까

 한 뼘의 파라솔이 그늘을 짓고 우리는

 통째로 두고 간 유실물로 남겨져

 하나의 관광지를 이룬다


 *

 파도의 디저트가 되네 하나밖에 모르는 맛으로 사탕처럼 둥글게 앉아 녹아 가는 연인들

 철썩이는 파도가 핥아 가네

 발가락부터 녹으며 조금씩 둘레를 잃어 가는 사랑이여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던 연인들이 전투적으로 질투하고 비로소 세계는 달콤해지고 온화해지네


 *

 해변이라는 말을 좋아해

 물에 젖는 건 싫어하지만 햇볕이 남아 있는 단어들은 아껴 먹으려고 남겨 둔 사탕 같은 것


 *

 내가 먹어 본 사탕 중엔 네가 제일 별로였어

 너처럼이라는 직유가 가진

 설탕과 소금 사이의 결정체


 *

 네 말에 끈적끈적해진 나는

 입안의 상처들을 혀로 만지작거리며 피가 달다고 생각했다 달콤함을 모르고 조금씩 사라져 간다


 *

 바다가 범람하는 세계에서

 너는 고작

 오리발이었어


 *

 옷소매의 끝엔 해변이 있어

 서툰 세수와 훔친 눈물로 적셔 놓은

 사탕이 녹을 때까지만 출렁이는 해변에서 나는

 말라 가지 않는 헤엄을 배워


 안간힘을 다해서


 ― 〈사탕과 해변의 맛〉(『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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