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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영 Jan 15. 2019

'라면'의 미학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두 달째 가족들과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다. 엄마, 아빠, 고3 동생, 할머니, 거기에다 강아지 코코까지. 총 여섯 식구가 생전 처음으로 다 같이 원룸에서 생활하는 중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두 달이 다 지나가기까지 이 곳에서 살게 될지 몰랐다. 새로 지어지는 타운 하우스 단지로 이사를 가는데, 공사가 덜 끝나 입주가 미뤄져서 한 1-2주 정도만 오피스텔에서 지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공사는 계속 지연됐고, 처음의 한 달 계약에서 한 달을 더 연장해 두 달째 ‘달방 살이’ 중이다.


어려서부터 엄청나게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집이 좁든 넓든 항상 부모님의 안방과 내 방, 그리고 동생 방이 있는 집에서 평범한 4인 가족으로 살아왔다. 그런 우리 가족에게 처음 겪어보는 원룸 생활은 나름 흥미가 있는 새로운 생활 방식이었다. 정말로 집안의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져 옮기게 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임시의 거주 공간이니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원래 살던 집보다 훨씬 불편하고 열악했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우리가 이렇게 복닥거리며 살아보겠냐’라고 밤마다 여유로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버티면 ‘마당 있는 3층 집’으로 이사를 갈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정보다 오피스텔 살이가 훨씬 더 길어지면서 그런 여유와 희망은 온 데 간데 사라지고 현실에 대한 불만과 서로에 대한 원망만이 남게 되었다. 난방 온수 버튼을 눌러도 온수가 왜 제대로 잘 안 나오는지, 내 옷과 동생 옷이 왜 바닥에 아무렇게나 섞여있는지, 코코는 왜 이전과 다르게 방 안에서 배변 활동을 못 해서 신경 쓰이게 하는지, 잘 때 아빠는 또 코를 왜 그렇게 크게 고는지, 시험공부하느라 밤을 새워야 하는데 제대로 된 책상도 없는 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 식구들이 다 자는 방에서 핸드폰 불빛을 켜놓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까지 해당되는 고충들이다. 여유로운 농담이 오가던 처음의 분위기와는 달리 서로를 향해 고성과 짜증이 오가는 날들이 더 많아졌다. 이제 우리 가족의 목표는 이 공간을 하루빨리 ‘탈출’하는 것이다.


한편 두 달 동안 이 곳에 살면서 새로운 이웃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든든한 경비 아저씨가 있고 보완이 잘 되어있는 아파트 현관과 달리 어딘가 허술하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상가에 딸려있는 오피스텔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으면, 이 곳을 일상의 공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조금 놀랐던 것은 나와 또래인 듯 보이는 다 큰 자녀들이 있는 4인 가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주 어린 아기를 키우는 가족,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자녀들이 있는 가족들도 이 오피스텔에 살고 있다. 이 사람들을 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가. 어렸을 때 아주 큰 집에 살았던 건 아니었지만 항상 내 방은 있는 집에 살았다. 나는 내 방의 내 침대에서 자고 내 책상에서 공부를 하며 자랄 수 있었는데, 그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평범함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오피스텔에 살았더라면, 진짜로 우리 집이 망해서 이 곳으로 오게 된 것이라면’ 등의 가정들이 떠올랐다. 나의 수많은 가정의 상황들을 진짜 일상의 상황으로 감내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난 어느새 일말의 연민, 동정심,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감, 부채감 따위의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감히 어떤 감정들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조금만 자기 객관화를 해보니 내가 느낀 감정들은 무언가 찜찜하고 적절치 않아 보였다. 조금 무례하고 오만해 보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여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들의 삶을 안타깝게 여기고 상대적으로 나은 나의 처지에서 그들에게 부채감을 느낄 어떠한 이유도 권리도 없다. 그냥 또 다른 삶의 모습일 수 있는 것이다. 두 달 동안 이 곳에서 살면서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자는 것에 완벽하게 적응한 나처럼, 누나가 공부한다고 불을 켜놓은 와중에도 잠을 잘만 자게 된 내 동생처럼, 이제 작은 원룸에서의 배변 활동에도 완벽 적응해 똥오줌을 잘 가리는 코코처럼 이 곳도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삶의 공간 일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라면’의 가정을 멈출 수는 없다. 단지 나와 다른 삶이라고 생각하고 말아 버리기에는, 단 하나의 ‘라면’의 가정만으로도 그들과 다른 나의 삶이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의 현재의 삶과 내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설명해주는 수식 어구들은 수많은 우연의 맞물림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4인 가족의 착실한 딸이었던 나는 적어도 내가 성장할 동안은 전업주부였던 엄마의 정서적인 지지와 함께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자랐다. 주위 환경과 사회에 대한 적당한 관심도 있었으며, 어른들에게 공손하고 또래 친구들과 적당히 잘 어울리는 인성적인 측면도 꽤 갖춘 편이었다. 초등학교 범생이 시절, 나의 가장 큰 모토는 ‘열심히 공부해서 남 주자’였다. 말 그대로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것이다. 그 모토대로 열심히 공부해 들어간 미션스쿨의 특목고에서 나는 또다시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섬기고 나누고 베풀고 돌보며 변화를 선도하는 실력 있는 신앙인’이 되라고 교육받았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나보다 낫지 못 한 사람들을 위해 나의 능력을 환원하겠다는 그 생각은 내게 꽤 절대적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내가 느낀 오만한 감정들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오만함을 깨부수기 위해 ‘라면’이 필요하다. 내가 어려서부터 오피스텔에 살았더‘라면’, 아빠가 일정한 수입을 벌어오지 못했더‘라면’,  엄마가 맞벌이로 바빠 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지 못했더‘라면’,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좋지 않았더‘라면’, 공부할 수 있는 책상이 없었더‘라면’, 학비 때문에 특목고 진학을 포기해야 했더‘라면’, 정보 경쟁에서 소외된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였더‘라면’, 몸이 아팠더‘라면’... 내가 단 하나라도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완전히 다른 내가 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의 삶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타인의 다른 삶을 재단하기엔 너무나도 다양한 우연성이 내포되어 있다.  


나와 다른 삶, 어쩌면 ‘라면’의 조합들에 의해 한 끗 차이일지도 모를 그들의 다른 삶. 우연에 힘입은 내가 개인적인 동정심으로 그들의 삶을 구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물론 그들의 삶이 사회적인 차원에서 위계의 아래를 차지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회에서는 오피스텔에 사는 삶과 타워팰리스에 사는 삶을 단순히 생활환경의 차이가 아닌 사회적인 차이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우연성에 의한 생활환경의 차이가 사회적인 위계를 결정짓는 일을 최소화하려면 사회구조적 장치가 필요하다. ‘열심히 공부해서 남 주겠다’라는 생각은 나의 능력을 이러한 사회구조적 장치를 만들고 발전시켜나가는 데 사용하겠다는 의미에 더 가까워야 한다. 즉 나를 비롯한 모두가 우연성을 내포하는 취약한 삶의 기반에서 살아가는 상황에서 혹시 모를 나의 미래의 다른 삶을 위해, 내 자식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결국 열심히 공부해서 주려했던 남을 위한 도움은 미래의 나와 나의 가족을 위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실력 있는 신앙인’이 되어 선도하고자 했던 변화 역시 나와 내 가족을 위한 변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수많은 과거의 ‘라면’을 겪어온 주체로서 알 수 없는 미래의 ‘라면’을 준비하는, 철저히 나를 위한 행동에 가깝다.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 사회에 이바지하는 멋진 일을 하겠다는 나의 오래된 꿈은 오피스텔에서의 ‘라면’ 앞에서 비로소 솔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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