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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영 Jul 24. 2020

누군가의 '무더운' 여름

여름이 또다시, 왔다. 

여름은 떠나는 계절이다. 서울의 작은 임대아파트에 살았던 어린 시절, 다 같이 더위를 피해 집을 나와 한강 둔치에서 밤을 새곤 했다. 빵빵한 에어컨을 틀어놓고 넓은 집에서 즐기는 피서는 아니었지만, 선선한 밤공기와 왁자지껄했던 분위기가 어린 마음에도 나쁘지 않았다. 서울을 떠나온 후 ‘한강 밤 소풍’은 더 이상 없었지만, 매 여름마다 아빠 차를 타고 바다로 산으로 떠났다. 빠듯한 형편 때문에 해외여행은 못 가도, 국내 곳곳을 돌아다녔던 아빠의 카니발은 내게 최고의 캠핑카나 다름없었다. 물론 방학마다 가족들과 다 같이 해외여행을 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내게 괌, 푸켓과 같은 휴양지는 말로만 들어 본 곳이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우리의 ‘분수’에 맞게 여름을 즐겨왔다고 자부한다. 나에게 여름은 언제나 설레는 계절이었고 얼마든지 떠날 준비가 돼있는 계절이었다. 


그러나 여름이 ‘누구나’ 설렌 마음을 안고 떠나는 계절은 아니라는 걸, 그 골목에서 알아버렸다. 차와 건물들이 내뿜는 열기로, 다른 이들이 열심히 돌리는 에어컨의 실외기 바람으로 유독 더운 도시의 여름 속에서, 타의로 보금자리를 떠나야만 하는 이들이 있다. 도시의 골목 뒤에 숨겨진 여름의 쪽방촌은 도시가 내뿜는 온갖 열기를 다 흡수한다. 더운 여름에 ‘에어컨을 틀 수 있는 권력’의 대가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건 쪽방촌에 사는 늙고 병든 이들이다. 쪽방의 한여름 더위란,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이열치열’이라며 이겨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손바닥만 한 창문에 환기도 채 되지 않는 3평 남짓의 공간은 숨이 턱턱 막히고 정신이 혼미해지게 한다. 유일한 피서책은 골골 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 그리고 입고 있는 옷을 벗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이 가득한 쪽방촌에 혼자 살고 있던 그 중년 여성은 그럴 수 없었다. 그녀에게 옷을 벗고 돌아다니는 남성들의 존재는 더위와 더불어 여름의 또 다른 위협이 되었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그녀의 보금자리인 쪽방을 떠나는 것. 한밤 중 공원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날이 다시 밝아지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비추지만, 그 태양 아래 ‘일상’은 평등하지 않다. 자의로 일상을 떠날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곳이 괌이든 강원도이든, 그들에게 여름은 ‘떠날 자유’가 있는, 활기차고 싱그러운 계절일 것이다. 반면 선풍기 바람과 나체의 몸으로 일상을 ‘겨우’ 지키는 이들 역시 존재한다. 이들에게 여름은 괴롭고 힘든 계절이다. 그래도 그들은 보금자리에서 더위를 견뎌내고 밤의 선선한 공기를 ‘내 방’에서 느낄 수 있다. 사회의 바닥을 차지하면서도 남자여서 주어진 ‘최후의 위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위계의 층위는 잔인하도록 세세하다. 그들보다 더 위계의 아래에 있는 이들은 그 당연한 일상조차 파괴당한다. 유일한 보금자리에서도 내쳐지는 그들에게 여름은 ‘거리의 일상’이다. 


홈리스, 중년, 여성. 모든 위계의 아래를 차지하는 그들이 거리에서 맞이하는 건 사실 ‘일상’이라 할 수 없다. 생존의 ‘위협’이 그들을 기다린다. 뜨거운 쪽방에서 쫓겨나 거리에 나온 그들에게 선선한 밤공기와 풀벌레 소리는 여름밤의 낭만이 되지 못한다. 다른 ‘위력’을 두려워하며 밤이 끝날 때까지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지난해의 폭염이 무색하게 올해가 가장 뜨거운 해가 될 것이라는 애기가 무수하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더위 속에서 사람이 만들어 낸 구조의 민낯이 드러난다. 그들을 말라 죽이는 건 더위인가, 그들이 체화해버린 위계인가. 이 여름은 언젠가 끝나겠지만, 구조의 폭력은 없어지지 않을 테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무력해지는, 무더운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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