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J작가K(20회)(페미니즘을 말하다1)
A.I가 등장하는 새 소설을 쓰고 있다던 K가 말했다.
“A.I를 여자캐릭터로 만들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한 달을 고민했는데도 말이지...”
K가 비슷한 고민을 말할 때마다 난 늘 같은 조언을 한다.
그런데도 그는 매번 그걸 까맣게 잊고 말한다.
이럴 때 보면 그는 늘 같은 문턱에 걸려 넘어지는 아이처럼 서투르다.
생각에서도 사람마다 익숙지 않은 문턱 같은 게 있기 마련이니까.
내가 말했다.
“여자 되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
“맞아. 상상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포기하고 남자로 바꿔야 할까봐.”
“내가 말한 건 상상이 아니야.”
“여자 되기란 게 상상이 아니면 뭐야. 실제로 돼 볼 순 없는 거잖아.”
“여성이 놓인 자리에 자신을 놓아 보라는 거지.”
“그게 상상이랑 뭐가 달라?”
그가 오늘따라 계속 상상이란 단어를 쓰는 게 나는 거슬렸다.
그건 대부분의 남자들이 여성의 불행을 대할 때 반응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르지.”
“정말 깐깐하게 구네. 그래도 방법적인 면에선 상상 말고는 딴 게 없잖아. 설사 다르다고 치더라도, 그건 미묘한 차이 아냐?”
“미묘하지.”
“근데 그게 중요해?”
“미묘하지만 중요하지. 그래서 실은 미묘한 차이가 아닌 거야. 큰 차이지.”
“아, 형 이러지 말자... 지금 페미니즘 소설을 쓰려는 게 아니라고.”
“그럼 쓰지 마.”
실존주의에서는 ‘존재자’가 삶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럴 경우에만 그 존재자가 ‘살아있다’고도 한다.
타인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타인의 존재를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잠시나마 그 사람이 되어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그의 처지를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가 놓인 모든 사회적 관계와 처지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실체를 바라보는 것이므로 상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평생 남성으로만 살아온 이들이 여성의 삶을,
우리 사회에 놓인 여성성을
올곧게 바라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참내, 알았어. 들어 보자. 미묘한 차이를 한번 말해봐.”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의 뉴스를 접했다고 치자. 네 말대로 상상만 하는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넌 어떤 생각이 들어?”
“뭐... 무서웠겠다. 싫었겠다.... 수치스러웠겠고... 또...”
“그렇지... 그 차이인 거지.”
“여성 되기랑은 뭐가 다른데?”
“싫었겠다, 수치스러웠겠다,가 아니라, 싫다, 수치스럽다,인 거지.”
“흠...”
K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다르네. 미묘하게... 그게 왜 미묘한 차이가 아닌 건지도 알겠어.”
“말해봐.”
“바꾸려는 의지가 있고 없음의 문제군.”
동정과 시혜의 감정으로 거짓 상상으로 여성을, 장애인을, 성소수자를,
모든 소외받는 이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남성성은
앞으로도 전혀 이 상황을 끝내려는 의지가 없다.
잠시 동안 팔짱을 끼고 혀를 차고 한 마디씩 뱉으면 그뿐,
그로써 다시금 우월감을 느끼고 지나가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그들의 실존을 자각하는 것,
그들의 자리에 서보는 일은, 나를 바꾸고
조금씩 또는 한꺼번에
그들의 고통을 끝낼 수 있다.
K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우리 이 얘기 지난번에도 했었지? 기억나, 기억나!”
그래....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