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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다 Aug 19. 2022

안니발레 카라치와 추기경의 천장

한여름의 로마에서 가장 반짝인 그림



*2022년 6월 말~7월 초의 짧은 이탈리아 여행기를 겸하는 글입니다.



귀국 전날이었다. 로마의 어떤 비경보다도 공항의 에어컨 바람이 그리웠던 일주일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강타할 폭염을 예상하지 못해 예약이란 예약은 전부 한낮으로 잡고, 동선을 아낀다며 그 앞뒤로 다른 일정을 붙인 어리석음. 그 결과, 일주일에 딱 두 번 있는 파르네세 궁 영어 가이드 투어가 시작하는 오후 3시에 이르러 나는 기대감 대신 이를 악물고 있었다. 에어컨이 있는 대기실에 1분이라도 더 머물지 않고 굳이 중정으로 나와 설명을 시작한 가이드를 원망하지 않 위해 의지력을 소모하는 중이었다. 물론 중정이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대기실보다 역사적 가치가 높겠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고전과 현대를 조화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나, 아니면 지금 나만 더위를 먹은 건가.



매년 로마를 찾는 관광객의 수에 비해 파르네세 궁 방문 후기를 찾기는 쉽지 않다. 현재 프랑스 대사관으로 쓰이는 건물이라 접근성이 나쁜 탓이다. 공식 가이드 투어로만 들어갈 수 있는데 영어는 일주일에 두 번 뿐이고, 예약자는 이탈리아 경찰의 소지품 검사에 응해 가방을 탈탈 턴 후에야 입장할 수 있다. 미술사 전공자라는 가이드는 유창한 영어로 미켈란젤로가 이 건물을 "설계할 뻔" 했다는 말로 안내를 시작했다. 로마의 다른 대저택(보르게세, 도리아 팜필리, 바르베리니, 코르시니, 스파다...)과 달리 유독 이 건물만 미술관이 아닌 대사관이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파르네세 가문의 후계자였던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4세가 조상의 소장품을 탈탈 턴 순간 미술관이 될 가능성은 끝장났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폴리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과 카포디몬테 박물관을 얻었다. 손부채를 부치느라 가이드의 말에 집중하기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눈앞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건물의 크기에 비해 턱없이 작지만 그만큼 아늑한 작은 후원, 중정 쪽으로 창이 난 복도에 놓인 고풍스러운 안락의자들. 사무 공간에는 에어컨도 있겠지. 나는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모든 표면에 주저앉으며 체력을 아꼈다. 안니발레 카라치라는 이름이 가이드의 입에서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세 인물이 있는 자화상> / <그리스도의 세례>


이 여행은 카라치 투어였다. 코로나19로 인한 각종 리스크를 무릅쓰고 올여름에 굳이 유럽을 간다면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을 봐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프랑스 에트르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거나 포르투갈 라구스의 붉은 절벽 대신 '덕질'을 하러 이탈리아에 간 것이다. 밀라노, 볼로냐, 로마.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의 <세 인물이 있는 자화상>에서 시작해 볼로냐 산타 마리아 델라 카리타 성당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산티 그레고리오 에 시로 성당의 <그리스도의 세례>, 볼로냐 국립미술관의 <영광의 성모와 성인들>을 거쳐 이곳 로마에서는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성모승천> 및 보르게세 미술관과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의 여러 소장품을 보았다. 자기소개로 시작해 초기작을 거쳐 서서히 후기작으로 옮겨 간 셈이다. 이 흐름의 끝인 파르네세 궁의 천장화는 모두가 인정하는 안니발레 카라치의 대표작이자 그 이상이었다.


카라치는 서양미술사의 올림포스에 속해 있지만, 현재 그의 대중적 인지도는 올림포스 신화에서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정도가 아닐까 싶다. 자기 분야가 확고하고,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리스 신의 이름을 대 보라고 했을 때 다섯 번 안에 언급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름과 역할은 있는데 개성은 잘 모른다. 같은 곳에서 활동한 동시대인이며 서로를 존중했던 카라바조와는 비교가 힘들 정도다. 미술사에 있어서 카라바조가 혁명가라면 카라치는 개혁가일 텐데, 그래서일까. 개혁은 혁명보다 많은 맥락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맥락은 시간이 지나면 가장 먼저 잊혀지는 것 중 하나다.


카라바조처럼 안니발레도 지역 미술계를 충격에 빠뜨린 주역이었다. 미술 서적에서 카라치라고 하면 안니발레, 형 아고스티노, 사촌 형 루도비코 세 사람을 묶어 가리키는 경우가 흔하다(그래서 구분을 겸해 그냥 안니발레라 불릴 때도 많다). 셋의 고향은 라구 파스타로 유명한 이탈리아 중북부의 도시 볼로냐다. 세 사람은 당시 지역 미술계를 주도하던 매너리즘의 인공적이고 작위적인 우아함을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인체 비율, 뒤틀리지 않은 자세, 명쾌한 구도, 이해하기 쉬운 감정 표현 등을 추구했다. 셋의 대표적인 공동 작품으로는 볼로냐의 귀족인 필리포 파바의 저택 벽에 그린 '이아손의 모험' 연작이 있는데, 그림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연작 중 한 점을 가리키며 누가 작업했냐고 묻자 공동 작품이라는 뜻에서 "카라치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만큼 셋은 뜻을 같이했다.


<이아손의 모험> 연작 중 일부


셋 중 가장 어린 안니발레는 가장 대담하고, 가장 비사교적이며, 기성 화단으로부터 가장 큰 비난을 받았다. 사촌 형 루도비코는 볼로냐 선배 예술가들과 비교적 활발히 교류했고, 형 아고스티노는 사교적 재능이 뛰어났다. 반면 안니발레는 '화가란 그림으로 말한다'라고 생각하는 말수 적은 청년이었다. 안니발레의 첫 제단화인 산타 마리아 델라 카리타 성당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모델을 단순히 따라 그렸을 뿐 고차원적 아름다움에 다가가지 못한다는 악평을 들었다. 카라치 세 사람이 협업한 이아손 벽화 연작에서도 안니발레의 평이 유독 나빴다(이를 인지한 주문자 필리포 파바는 옆방에 비슷한 주제의 벽화를 그리기로 결정한 후 루도비코에게만 일을 맡겼다. 하지만 루도비코는 몰래 안니발레에게 도움을 부탁해 사촌동생에 대한 신뢰를 증명했다).


그러나 안니발레 카라치는 선배들의 악평에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볼로냐 밖에 그의 예술적 갈망에 불을 지피는 ‘진짜 거장’들이 있었다. 안니발레는 파르마와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북부 각지를 여행하며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을 공부했고, 코레조의 감각적인 신비로움이나 베네치아 화가들의 아름다운 색감 등을 자기 것처럼 흡수했다. 고향 볼로냐에 있을 때도 형, 사촌 형과 함께 끊임없이 주변 사물과 모델을 스케치하는 등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카라치 3인방은 볼로냐에서 가장 인기 높은 신예 화가로 떠올랐다. 셋은 '아카데미아 델리 인캄미나티'라는 단체를 세워 동료 예술가들과 습작 및 토론을 꾸준히 이어 갔고, 후학도 양성했다. 뜻을 같이하는 젊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새로운 이상을 꿈꾸는 순간에는 그 이상에 내재된 폭력과 모순이 아니면 파괴하기 힘든 담백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 시절도 안니발레에게 그런 기억으로 남지는 않았을까.


볼로냐는 카라치 가문의 등장과 함께 이탈리아 예술계의 신흥 세력으로 떠올랐지만, 이탈리아 화가라면 누구나 진출하고픈 ‘꿈의 도시’는 여전히 로마였다. 세 카라치 중 안니발레만이 '높으신 분'으로부터 로마로 와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볼로냐 인근의 파르마 공국을 지배하던 파르네세 가문의 로마 저택에 그릴 벽화를 의뢰받은 것이다. 안니발레가 그림을 그릴 장소는 파르네세 공작의 동생,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추기경의 개인 공간이었다. 이십 대의 젊은 나이였던 오도아르도는 가문의 이익을 위해 추기경이 된 탓에 종교적 열정이 부족한 편이었다. 따라서 파르네세 가문은 오도아르도의 개인 공간이 젊은 추기경이 '올바른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꾸며지길 원했다. '카메리노(camerino)'라 불리는 이 방은 당연히 파르네세 궁 투어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카메리노로 이동해 봅시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카메리노 천장화


카메리노 천장화는 마치 은실로 빼곡하게 자수를 놓은 천조각을 금실로 이은 후 그림이 그려진 브로치를 꿰매 놓은 듯한 모습이다. 다른 그림은 상관없지만, 정중앙을 차지한 <헤라클레스의 선택>은 나폴리에 간 진품 대신 어둡게 변색된 복제품으로 대체되어 있다. 다행히 나는 3년 전 나폴리 카포디몬테 박물관에서 진품을 이미 보았다. 주인공 헤라클레스는 안니발레의 후기 작품에서 종종 보이는 크고 부리부리한 눈매의 소유자다. 짧게 다듬은 곱슬머리와 수염 없는 얼굴로 인해 그리스 영웅보다는 로마 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옳은 것과 즐거운 것 중 무엇을 선택하겠느냐는 이 그림의 질문은 꽤나 직설적이어서, 오도아르도가 딴짓을 하다가 천장에 눈길이 가면 잔소리를 듣는 기분이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고개를 덜 꺾어도 보이는 다른 벽화들은 미덕을 이미 선택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세이렌의 유혹에 저항하는 오디세우스, 메두사의 목을 베고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페르세우스, 나이 드신 부모님을 들쳐 메고 화산 폭발 현장을 빠져나오는 카타니아의 두 형제. 파바 궁 시절부터 신화나 전설을 주제로 한 벽화를 여러 번 그려 본 만큼, 안니발레는 이런 그림에서는 등장인물이 최대한 크게 그려져야 메시지가 잘 전달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그림에서 도저히 장거리 여행에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배가 작게 그려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카메리노 벽화는 나름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이 벽화뿐이었다면 프랑스 대사관이 굳이 보안상의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일반인 대상 가이드 투어를 운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가이드가 말했다. "카메리노는 일종의 테스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과물이 마음에 든 파르네세 가문은 더 큰 주문을 안니발레에게 맡기기로 결심한다. 가문의 자랑인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상 컬렉션을 전시할 갤러리 룸의 천장을 장식할 대형 프레스코화였다. "이제 갤러리로 가 보실까요?" 초반부에는 부채질만 하며 맨 뒤를 수호하던 내가 이제는 가이드 바로 옆까지 왔다. 책에서 여러 번 본 그 천장화가 저 문 너머에 있었다.


파르네세 갤러리 천장화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눈은 위를 향했다. 그 새 몸이 식었는지, 그저 집중했기 때문인지 더 이상 덥지 않았다. 분명 따로 조명을 설치한 것 같지 않은데, 천장을 꽉 채운 그림은 은은한 간접 조명을 설치한 것처럼 빛을 발했다. 2015년의 복원 덕분에 어제 그려진 듯 선명하고 화려한 색채도 눈에 띄었다. 성당 등 공공건물에 비해 층고가 낮다 보니(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층고가 20m가 넘는 반면 이곳은 약 6m에 불과하다) 이미지와 두 눈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운 편이었고, 그만큼 생생함은 배가되었다. 예술 전시실이라는 용도를 의식한 듯, 천장은 화랑의 모습을 모사하고 있다. 천장에 금박 액자로 화려하게 표구된 그림 열몇 점이 걸려 있고, 그 주변의 공간은 녹색으로 산화된 청동 메달과 벌거벗은 인물 군상들이 빼곡히 채운다. 얼핏 보면 진짜 같지만 실은 프레스코 물감과 붓이 만들어낸 환영이다. 안니발레의 가짜 건축과 가짜 빛이 신들의 극장을 영원히 지탱하고 또 비춘다.


파르네세 갤러리 천장화의 일부


가장자리에 놓인 탁자 두어 점과 그 위에 놓인 거울 몇 개를 제외하면 방 안에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벽에 몸을 기댔는데, 뜻밖에도 가이드가 주의를 주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오리지널 스투코(석회 등으로 만든 마감재)에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깜짝 놀라 몸을 뗐다. 다행히 손상이 생긴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벽 근처에 다가가지 않았다.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보안을 이유로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공간인 만큼 주어진 시간 내에 최대한 봐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지만, 어떻게 설명을 시작할지 궁금했다. "이 프레스코화는 '신들의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파르네세 가문의 수장이자 오도아르도 추기경의 형인 라누치오 파르네세 공작과 마르게리타 알도브란디니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설이 있었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미 반박된 학설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이 방의 분위기가 방금 지나 온 카메리노의 분위기를 정면으로 배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두 공간이 동일하다. (구약성서, 이아손 신화 등) 특정 서사를 선택해 그 전개를 묘사하는 대신 특정한 주제를 선정한 후 이에 맞는 고전 속 여러 일화를 옴니버스 식으로 제공한다. 그러나 도덕, 윤리, 절제를 찬양하는 카메리노와 달리 이곳은 감각의 폭발, 강렬한 휩쓸림, 그리고 그로 인한 거대한 혼돈과 불확실성을 찬양한다. 그  힘이란 바로 '사랑', 성적 욕구와 낭만적 감정을 어지럽게 뒤섞은 모호하고 위험한 통칭으로서의 사랑이다.


천장화의 중심 이미지인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승리>


이처럼 시끄러운 천장화는 처음이었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유혹의 속삭임, 만취한 신의 술주정과 분노한 거인의 외침. 카메리노가 설파하던 덕, 정의, 질서, 절제는 이 방의 주인이 아니다. 천장 중앙에서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배우자 아리아드네와 함께 승리의 행진을 벌이고 있으며, (작업 초반부에 안니발레를 보조한 형 아고스티노가 그린) 바로 옆 패널에서는 포세이돈의 아들 트리톤이 아프로디테의 음부를 대담하게 손으로 감싸고 있다. 다른 그림은 그만큼 대담하지 않지만, '사랑'이 지닌 강력한 혼돈의 힘을 묘사하기는 마찬가지다. 사랑은 강자-남자와 약자-여자의 사회구조를 전복하고(이올레에게 힘과 남성성의 상징인 사자 가죽과 곤봉을 모두 내어준 헤라클레스), 한 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질 분란의 싹이며(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황금 사과를 건네는 헤르메스), 심지어 해가 뜨고 지는 우주의 원리에 어깃장을 놓는다(케팔로스에게 반해 지상에 새벽을 가져오는 임무를 저버린 에오스).


안니발레는 이 작품에 이르러 자신이 평생 존경하고 또 영감의 대상으로 얻었던 르네상스의 거장들을 자신의 화폭 속에 녹여냈다. 미켈란젤로의 웅장한 역동성, 라파엘로의 흠결 없는 단정함, 티치아노 등 베네치아 화가들의 세련된 색채 감각, (다른 거장에 비해 희미하지만) 코레조의 아련한 관능 등이 골고루 스며들어 있으되 그들 중 누구와도 지나치게 닮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한다는 것이 미술사가들의 평가다. 그래서 서양미술사에서 파르네세 갤러리 천장화는 종종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이래 가장 영향력 있는 천장화로 여겨진다. 미켈란젤로에게 교황의 천장이 있었다면, 안니발레에게는 추기경의 천장이 있었던 것이다. 화가가 그림을 마침내 완성한 날 새벽에 첫 햇살을 혼자 받으며 마지막으로 그림을 점검했고,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사실은 단단한 자부심과 함께 방을 나섰으리라고 상상해 본다. 그리고 그다음에 찾아온 것은... 좌절과 우울.


<아르테미스와 판> / <파리스와 헤르메스>


안니발레는 <신들의 사랑>을 작업할 동안 파르네세 가문에게 그리 좋지 못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궁 내에서 그의 숙소는 하인이나 쓸 법한 누추한 곳이었으며, 천장화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기는커녕 저택 인테리어에 필요한 사소한 디자인까지 떠맡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함께 작업했던 형 아고스티노가 안니발레와의 불화로 고향 볼로냐에 돌아간 후 사망했다는 소식마저 전해졌다. 평생의 예술적 동료인 형을 잃은 안니발레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신들의 사랑>이 완성되자, 로마의 화가와 지식인들은 새로운 걸작의 탄생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파르네세 가문의 인척이기도 한 피에트로 알도브란디니 추기경은 고가의 금목걸이를 선물한 후 안니발레에게 그림을 의뢰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의뢰인인 오도아르도 추기경의 반응은 싸늘함에 가까웠다. 대형 천장화 시세를 감안할 때 터무니없이 낮은 500스쿠디, 그나마도 직접 얼굴을 보기는 귀찮다는 듯 하인을 시켜 전달했다고 한다.


그렇게 안니발레는 우울의 덫에 걸렸다. 진단할 길이 없으니 현대적 의미의 우울증이라 단정 지을 순 없지만, 무기력에 빠진 그의 작업량이 심각하게 줄어드는 것을 걱정한 제자들이 '하루에 두 시간은 그림을 그린다'는 내용의 약속을 받아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걸려 있는 말년 자화상, 미국의 게티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자화상 스케치 등에서도 쓸쓸함 혹은 씁쓸함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말년의 안니발레가 자주 그린 주제 중 하나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애도'였다. 로마에서 라파엘로와 고전 예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 색감과 인물의 형태는 볼로냐 시절의 어느 작품들보다도 단단하고 선명하지만, 늘 푸른 옷을 입은 성모는 반쯤 죽은 사람처럼 파리하다. 존경하는 스승을 잃은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는 가장 선명한 금색이나 붉은색의 옷자락으로도 닦아낼 수 없는 눈물이 고여 있다.


파르네세 갤러리 천장화가 완성된 지 겨우 1년 후인 1609년, 안니발레 카라치는 제자들과 함께 살던 집에서 가난하게 죽었다. 향년 49세였다. 매장지는 로마의 위인들만이 묻히던 판테온, 생전에 존경하는 라파엘로의 묘 옆으로 정해졌다. 남겨진 사람들이 보내는 뒤늦은 헌사였다.


안니발레 카라치, <피에타> / <그리스도를 애도함>


그 새 가이드 투어는 끝났다. "이제 나가 볼까요.” 출입문 앞에서 가이드의 간단한 마무리 멘트가 끝나자 스무 명 남짓한 참가자들은 푹푹 찌는 로마의 더위 속으로 각자 흩어진다. 나는 버스를 타러 캄포 디 피오리 광장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신들의 사랑>의 관람객이 오직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창작자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맞추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안니발레가 결혼을 하거나 연애를 한 적이 있음을 증명하는 공식 기록은 없다. '바로크'라는 광의의 명칭 아래 종종 묶이는 렘브란트, 루벤스, 카라바조가 모두 애인이나 아내의 얼굴을 화폭에 담았던 것과 달리, 서구 각지의 미술관에 소장된 수많은 카라치 소묘에서도 연인 후보라 특정할 만한 인물은 없다. 볼로냐의 원가족과 헤어져 로마로 온 후 제자들과 산 사람답다. 말수가 적고, 확신에 차 있고, 자기가 사랑하는 분야에 모든 걸 바쳤지만 그 기저에는 늘 약간의 우울함이 깔려 있어서 필생의 대표작을 완성한 후 오히려 삶의 방향성을 잃고 늪으로 떨어진 화가. 내가 안니발레 카라치에게 처음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사실은 그 추락 때문이었다. 그 모든 천재성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결국 떨어져 버린다는 게, 우울의 검고 축축한 질감은 늘 똑같다는 게 먹먹했다. 고야의 <검은 개>를 처음 봤을 때와 조금 비슷한 기분이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검은 개>



그러나 <신들의 사랑>은 바람 부는 절벽에 홀로 선 듯한 그 감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욕정과 로맨틱한 감정을 구분 짓지 않은 채 '사랑'이라 부르며 냉소적인 유머 감각을 담아 찬양할 뿐이다. 21세기 사람이 공감하기에는 너무 낡고 케케묵은 사고관인데. 솔직히 말해, 납치되는 가니메데나 이성에게 차인 화풀이로 주변에 폭력을 행사하는 거인 폴리페모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르테미스 여신이 황금 양털에 눈이 팔려 (장점이라곤 별로 없고 성욕만 강한 이미지인 반인반수의 하급 신) 판의 구애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는? 이탈리아 프레스코화의 다른 걸작들, 예를 들어 조토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모두 기독교적 주제를 담았다. 전지전능한 유일신이나 희생의 구원자를 믿지 않더라도 낙원에서의 추방, 노아의 홍수, 예수의 십자가형 등은 일반 상식이나 다름없는 소재다. 도덕과 윤리에 대한 이야기니 이해하기도 쉽다. 반면 파르네세 갤러리는 400년 전 지식인들이 당대의 지적 취향을 담아 편집하고 해석한 2000년 전 신화 속 일화를 묘사한다. 시대적 맥락에 대한 이해와 비판적 사고의 필요성이 운동화 속 모래처럼 '그저 순수하게 감동'받을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걸 감수하고 싶지 않다고, 좀 더 티끌 없는 아름다움이 좋다고 하겠지. 다행히 주이탈리아 프랑스 대사관은 원치 않았던 여행자가 실수로 찾기엔 좀 어렵고 복잡한 곳이다.


파르네세 갤러리의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든 순간 내가 본 것은 과거가 자신의 다양한 얼굴을 동시에 들어 방문자를 맞이하는 모습이었다. 문명의 변화와 발전, 사회질서와 가치관의 변화, 그 모든 이질성을 잠시라도 잊게 해 주는 감정이입에 기반한 친밀감. 시간을 거스르는 것이 평생의 소명인 복원 전문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때와 실금과 먼지가 가득해야 할 과거의 얼굴들은 갓 태어난 듯 반짝였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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