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유독 화가 나는 면은 엄마의 결핍된 면일수도 있다.
아이가 동물원에 가자고 해서 동물원에 갔다.
배고프다고 갈비가 먹고 싶다고 해서 갈비집에 갔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해서 편의점에 갔다.
편의점에서 포켓몬빵 예약을 해달라고 해서 내일 찾으러 가기로 했다.
오늘 하루 아이와 함께 참~ 즐거웠다.
라고 쓰고 싶지만,
사실 나는 화가 나는 걸 겨우 겨우 참느라 힘든 순간들이 많았다.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동물원이 아니라 해변가의 까페였고,
내가 먹고 싶은 건 갈비가 아니라 초밥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화가난 건 아니다.
아이에게 까페가 즐거운 곳이 아니고,
아이는 초밥을 못 먹는다는 걸 아니까.
포켓몬빵 예약하고 찾으러 가는 게 귀찮아서
화가난 것도 아니다.
수고스럽지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처음부터 화가난 건 아니다.
내가 화가 나기 시작한 건, 아이의 요구가 계속되면서 부터였다.
동물원 가자, 갈비먹자, 아이스크림 사달라
끊이지 않고 요구하자 불편해지기 싲가했다.
그런데 아이가 엄마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왜 아이의 요구가 불편할까?
나는 왜 아이가 계속 요구를 할 때 화가 솟구칠까?
그때 내가 요구를 어려워했던 게 떠올랐다.
나는 요구를 못하는 편이었고
지금도 요구나 부탁하는 걸 어려워한다.
나에게 아이의 반복되는 요구는
"엄마는 지금도 요구를 어려워하는데
넌 이렇게 맘대로 해?"
라는 메세지로 전해진다.
이러니 불편할 수밖에.
만약 아이가 나와 똑같이 요구나 부탁을 어려워 한다면
그 모습도 똑같이 나에게 불편했을 것이다.
나에게 다루어지지 않은 면이니까.
아이에게 유독 화가나는 면이 있다면
그건 엄마에게 아직 다루어지지 않은 면, 결핍된 면일 수 있다.
그것은 아이를 통해 발견되기 때문에 불편하다.
그러나 아이를 통해 채워지고 다루어질 수 있다.
아이에게 유독 화가 나는 면이 있다면
화로 돌려주는 대신
나에게 다루어지지 않은 면이 있나,
나의 결핍된 면은 아닐까 생각해보자.
나처럼 요구를 하는 아이에게 화가 난다면,
화 대신 요구를 해보는 게 좋다.
"엄마 다리 밟아줘."
"엄마 안아줘."
"엄마한테 오늘하루 수고했다고 말해줘."
라고 말하자
아이는 흔쾌히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자 내 불편했던 마음이 편안해졌고
신기하게도 화도 사라졌다.
아이는 엄마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들어준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요구하기가 전보다 덜 불편해져간다.
완전히 편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편하다.
그러니 아이가 나의 결핍을 채워준 셈이다.
내가 아이를 키우지만,
아이도 엄마를 키우고 있다.
육아는 사랑으로
서로를 키우고
서로를 채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