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도 될 것 같은 하루가 있다. 가스레인지에 눌어붙은 기름때처럼 방바닥에 딱 달라붙어 하루 종일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나에겐 그런 날이다. 보통 그런 날엔 기분마저 울적하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나면 365일 중에 없어도 될 것 같은, 올해 나는 364일을 살았다고 말해도 될 것 같은 하루가 되어버린다.
그런 날에는 온몸이 무기력하다. 움직일 힘이 없으니 밥 먹을 기력도 없다. 아침은 그대로 건너뛰고 점심은 대충 라면으로 때운다. 냄비 라면보단 컵라면이 제격이다. 커피포트에 수돗물을 대충 받아 급속도로 물을 데운다. 물이 데워질수록 기계는 다급하고 불안한 소리를 낸다. 내 마음도 점점 초조해진다. 절정의 순간 숨을 끊어내는 커피포트 소리에 나는 참았던 숨을 뱉는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그에게서 물을 해방시킨다. 대충 선에 맞춰 물을 부어 놓고, 나는 나를 다시 이부자리로 내던진다. 휴지 조각이 방바닥에 의미 없이 던져진다.
4-5분이 지나면 TV 앞에 상을 펴고 앉는다. 왼손엔 리모컨, 오른손엔 젓가락을 든다. 평상시 바른 자세를 고수하지만 이런 날 만큼은 아무렇게나 앉는다. 우리 할머니가 앉는 자세, 식탁 의자에서 그렇게 앉아 먹으면 아빠한테 똑바로 앉으라고 잔소리를 들었던 자세. 보란 듯이 나는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온몸을 한없이 비틀어 구부정하게 앉는다.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해방감을 느끼며 나는 나를 아무렇게나 방치한다.
다 먹은 라면 그릇은 싱크대 속에 넣는다. 어제저녁에 넣어 둔 그릇 위에 김치가 말라비틀어져있다. 참 신기하다. 이렇게 하루 이틀만 내버려 두어도 모래바람 속 산등성이 돌멩이가 되어버린다. 풀도 없는 땅바닥에 바람만이 위로가 되는 작은 돌덩어리. 그저 그렇게 소리 없이 풍화되고 파괴되고 썩고 사라져간다. 부엌을 지나가다 흘깃 그 모양새를 바라보곤 못 본 척 눈길을 거둔다.
정신이 저 밑바닥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내 육체는 깊은 물속에 발이 묶인 채 힘없이 표류하고 있다. 생각이라는 또 다른 자아가 날 괴롭힌다. 욕하고 짓밟는다. 내가 내가 아니다. 어릴 적 받은 상처부터 성인이 되어 감당해야 했던 아픔이 내 육체를 마구 할퀴며 지나간다. 분명 나이를 먹었는데 7살 상처받은 어린애가 튀어나온다. 분명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그날 밤 벌거벗은 내가 눈물로 서있다.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어제까지 원망도 미움도 다 사라졌다 믿었는데 어딘가 숨어있던 녀석들이 다시 이불 속에서 고개를 슬며시 내민다. 공포 영화 속 귀신같다. 아무리 도망쳐도 불쑥 나타나 내 얼굴 앞에 피 흘린 눈을 내밀고 악을 지른다.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다. 받을 힘이 없다. 몇 번 울리다 조용히 끊어진다. 그렇게 당신과 나를 연결할 듯하던 얇은 실은 맥없이 끊어져 버린다. 무기력한 나는 그저 무겁게 눈꺼풀을 감았다 뜬다. 나의 시선은 책장에 붙여놓은 어릴 적 사진으로 옮겨진다. 손바닥만 한 나를 안고 한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엄마. 내 엄마. 엄마는 나를 낳고 행복했을까? 품에 안겨있는 저 아이는 지금의 내가 맞을까?
오늘은 모두가 적이다. 얇은 유리막 하나로 아슬아슬하게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 날 향해 누군가 날카로운 칼을 내민다. 너무나 쉽게 그 막이 찢어지고 깨지고 만다.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든다. 더욱 웅크린다. 나는 점점 작아진다. 엄마 배 속에 다시 들어가고 싶다. 아니 누군가의 배 속이라도 상관없다. 나는 태아가 된다. 모체와 내가 연결된다. 팔다리도, 머리도, 마음도 모두 작아진다. 무작정 작아진다. 작은 세포가 되어 버리고 만다. 더 작아진다. 더 더 더. 사라진다. 영원히 사라진다. 원래 없었던 거니까 괜찮다. 어딘가 내 영혼은 무의미하게, 바라던 대로, 떠돌다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