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은 그 사람의 사상이다. 가방을 보면 그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 소비 성향 등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28년간 패션계에 근무하고 임원까지 한 후에 퇴직한 한 지인은 꼭 에코백만 들고 다닌다. 명품 가방을 살 돈이 없어서는 당연히 아니다. 필요할 때야 들겠지만 평소에 실용적이고 친환경적인 가치를 중시해서다. 그런가 하면 최근 명품 가방을 빌려주는 업체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구독 서비스의 또 다른 형태인데 샤넬이나 에르메스 등의 고가 브랜드도 일주일에 10만 원 정도 내면 빌릴 수 있다고 한다. 이 정도 되는 가방을 구매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다. 가방은 경제력이라기보다는 사상에 가깝다.
엄마가 되었다고 사상 고쳐먹지 못한 걸까. 출산 준비물 중 하나인 기저귀 가방만큼은 정말 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엄마가 된 것만으로 나의 정체성은 패러다임의 격변을 겪고 있는데 굳이 '나는 애 엄마입니다'하고 광고할 필요 있나. 여기서 잠깐. 기저귀 가방은 기저귀만 담고 다니는 건 아니고 젖병, 분유, 간식, 손수건 등 아기가 쓸 모든 용품들을 담을 수 있는 가방이다. 기저귀 가방이라고 전문 회사에서 따로 나오기도 한다. 수납공간이 많아서 필요한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실용성이 강조되는 만큼 패션에는 테러 아이템이다. 괜찮은 디자인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내 세속적인 사상이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패션에서까지 '나는 어머니오'라고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프라다나 롱샴 등의 브랜드에서 널찍하게 나온 쇼퍼백을 기저귀 가방으로 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요점은 이거다. '이미 나는 어머니인데 패션까지도 아기한테 양보하긴 싫다.'
소아과를 갈 때도, 산부인과를 갈 때도 꼭 아기가 생기기 전에 들던 작고 예쁜 가방, 혹은 명품 쇼퍼백을 들고 다녔다. 기저귀와 아기 용품은? 지퍼백에 잘 정리해서 넣어 다니면 된다. 찾기는 조금 불편하지만 뭐 어떤가. 내 패션이 죽지 않는데. 지나가는 아줌마들이 '어머 저 엄마는 애 엄마 같지 않아'라고 바라봐주길 바랐던 게 분명하다.
기저귀 가방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다. 시어머니는 어디서 기저귀 가방의 정석인 나라야 가방을 구해다 주셨다. 기저귀 가방으로 딱 좋지 않냐고. 누비천으로 만든 핫핑크 나라야 가방. 누가 봐도 딸 엄마 같은 가방이다. 이 가방은 내 커다란 명품 쇼퍼백 안에 꼭꼭 숨어 있었다. 그러니까 사실상 나는 가방을 이중으로 들고 다닌 거다.
무겁다. 또 번거롭다. 그래도 패션만큼은 포기하기 싫었다. 대체 핫핑크 누비천 가방을 어떤 옷에 맞춰 들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남편이 대안으로 제시한 가방도 만만치 않다. 나일론으로 된 화장품 사은품 가방인데 디자인 자체는 예쁘지만... 가방은 사상이라니까요.
이 가방 역시 내 명품백 안에 꼭꼭 숨어 있었다. 조금도 삐져나오지 말거라. 스타일 망가지니까.
익숙해지면 불편함도 더 이상 불편함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외출 후 가방 정리를 두 번 하면 뭐 어떤가.
문제는 기저귀 처리. 수유실이나 화장실에 기저귀 교환대가 잘 갖춰진 곳에 가면 다행이지만 이따금 차에서 처리해야 할 때가 생긴다. 소변이면 그나마 낫지 대변이면 정말 문자 그대로 아기가 나에게 똥을 주는 거다. 물티슈로 어찌어찌 엉덩이 닦아주고 기저귀를 갈고 나면 온 차는 물론 내 손에서까지 냄새가 빠지질 않는다.
그렇게 몇 개월을 살았다. 기저귀 가방에 던지려던 대소변 기저귀는 슛 미스로 나의 소중한 명품백에 처박혀 있기도 하고 가끔은 여기에 분유도 쏟는다. 가죽의 매끈한 겉면은 여전히 위풍당당하지만 그 안은 아기의 잔해로 정신이 없다. 당당하게 구찌백을 열었는데 안에 아기 과자 부스러기가 '나 여깄지'하고 조소를 날린다.
그게 꼭 내 모습 같았다. 애기만 없으면 누가 나를 아이 엄마로 보겠는가. 몸도 예전과 다를 바 없고 패션도 포기하지 않은 상태다. 아직도 애 없이 혼자 택시 타면 기사님들이 결혼하셨냐고 묻는다. 호호.
하지만 내면은 이미 철저하게 갈리고 갈린 아기 엄마다. 대리석 같던 나의 자아는 깨지고 또 부서져 이제 옥토를 향해 가고 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어 보인단 얘길 듣고 살았는데 이제는 헐랭이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다른 사람을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관리하듯 완벽하게 할 수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인간미 없던 내면은 아기 똥, 분유 등으로 점철되어 엄마 냄새난다.
아기를 데리고 산책하다 다른 아기를 보면 더 웃어주고 이따금 간식도 가방에서 꺼내 준다. 놀이터에서 만난 다른 아이 엄마들과도 스스럼없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 잘난 맛에 살던 명품 가방 같은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냥 기저귀 가방 든 엄마다. 명품으로 아무리 화려하게 감싸도 나는 아이 엄마다. 겉모습이야 어찌 됐든 내 1순위는 결국 아이, 가족인 거다. 가죽에 아기 분유가 쏟아지든 기저귀에서 대변이 새든 소중한 건 아기지 가방이 아니다. 세상 어떤 엄마가 아기가 자기 가방에 토했다고 윽박지르겠는가. 토한 아기를 걱정하지.
엄마가 된 내 삶에 이전까지의 나는 지워지고 점점 엄마라는 존재가 견고해진다. 그게 나쁘지만은 않다. 명품백은 보이는 것만으로 서열을 만들어버리지만 기저귀 가방은 엄마라는 정체성으로 많은 이들을 수평선에 놓는다. 직장에서 우리가 서로 얼마나 어떤 성과를 냈나 경쟁하고 있다면 놀이터에서 우리는 각자의 아이가 잘 놀고 있는지, 어떤 친구와 놀이 기구를 좋아하는지 보고 있다. 엄마들의 시선은 늘 한결같이 아기를 향한다.
엄마가 된다는 건 명품백과 기저귀 가방의 병존이 아닐까 싶다. 내 껍데기는 변치 않을지언정 그 안은 분명히 대변혁을 겪는다. 가치관과 우선순위의 재정립이다. 그리고 점점 그렇게 기저귀 가방이 편해지는 거다. 타인을 의식한 모습, 또 개인적인 취향은 점점 내려놓고 아기와 동화되는 중이다. 물론 정말 좋아하는 끌로에 블라우스에 아기가 이유식을 묻혀 놓으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지만... 아기 말고 내 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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