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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Mar 10.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2회

감성 성장 프로젝트 II


2


노인은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시낭송가였다. 요즘이야 하루가 멀다 하고 전국 각지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시인들과 문학작품들을 내세워 전국 시낭송대회를 개최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공식적인 대회가 전무한 시대였다. 몇몇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연 작은 낭송회나 어떤 문학행사에 초대받아 식전에 낭송 무대를 올리는 것이 고작인 대중적 낭송이 열악한 시대였다. 그에 반해 비공식적으로 마련된 자리는 엄청나게 많았던 듯하다. 그것은 노인이 들려주는 무용담 같은 무대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세상은 온통 시낭송으로 가득 찼던 시대였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서다. 그의 목소리는 늘 부드러우면서 힘이 있었고, 감성적이면서 이지적인 느낌을 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슬픔을 목구멍까지 올려놓았다가 단숨에 휘발시켜 정신을 못 차리게 하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막 지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인들의 송년회 자리에 노인은 초대받았다. 마침 감기에 걸린 상태라 외부활동을 자제하는 중이었는데, 시인 중 한 명이 간곡히 부탁하는 탓에 그는 그만 거절을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아 어정쩡한 수락이 된 것이다. 노인은 행사를 하기로 한 어느 문학관에 도착하자마자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행사는 진행 중이라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었다. 낭송을 할 때 배경음악으로 준비한 USB를 놓고 온 것이다. 감기약을 먹은 후라 다소 정신이 몽롱했다. 노인은 음악을 손수 고르는 편이라 아무 음악이나 틀어놓고 낭송하는 것을 예민하게 불편해하곤 했다. 몇 차례 그런 갈등을 주최 측과 겪게 되다 보니 직접 챙기는 것이 원활한 진행을 위해 낫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낭송도 길게 고민한 끝에 고른 음악이라 나름 흡족해하고 내심 기대도 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금세 마음을 고쳐 먹고 아쉽지만 음악 없이 낭송을 하기로 했다. 노인은 행사의 앞부분에 단체의 대표쯤 되는 이의 여러 인사말과 자축의 이야기들을 듣고 나자 바로 무대에 올랐다. 노인은 어디서부터 시작인지 알 수 없게 불어오는 미풍처럼 활자는 음성에 담아 전달하다가 갑자기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동반한 태풍처럼 목소리에 시어들을 묶어 청중에게 쏟아내기를 반복했다. 그 반복은 패턴을 가지지 않아서 예측할 수 없는 브라운 운동을 하는 입자같이 눈과 귀를 뗄 수 없었다. 노인은 낭송을 끝냈지만 청중은 한동안 반응을 내기를 조심스러워했다. 이 적막은 첫눈 내린 수도원의 마당처럼 함부로 발도장을 찍기 두려울 정도였다. 청중의 경의를 담은 박수와 표정들을 온 가슴으로 받아 안은 노인은 조용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낭송을 부탁받은 날 이후로 저는 무슨 연유였는지는 모르나 시인들 앞에서 낭송을 한다는 것에 대한 깊은 회의가 들었습니다. 노래는 작곡가보다 가수가 더 그 맛을 잘 살리지만, 시낭송은 낭송가가 그 시를 쓴 시인보다 더 잘할 수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예전에도 그런 생각이 간혹 들었지만 이번에는 더욱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시낭송가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끊임없이 저를 괴롭히고 쉬 사라지지 않더군요. 그런 고민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늘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혹시 여러분은 제가 방금 전에 낭송한 시의 배경으로 나온 음악을 기억하시는지요?


노인의 고백 같은 소감은 익히 그 유명세와 실력을 알고 있는 시인들에게 작은 충격이었으나 너무 차분하고 진지해서 염려보다는 질문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는 첼로 연주가 들어간 클래식이었다고 말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구슬픈 곡조의 아리아가 들어간 오페라곡이 줄곧 흘렀다고도 했다. 심지어 곡명까지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이내 노인은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머금더니 내려놓았던 마이크를 입에 가져갔다.


-죄송합니다. 오늘 낭송은 제 착오로 배경음악을 틀지 못했습니다.


좌중은 이내 술렁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어수선한 틈을 비집고 노인은 이내 말을 이어갔다.


-시낭송의 존재 이유를 새삼 오늘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감상해주신 바와 같이 낭송을 할 때에는 결코 목소리만 청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거죠. 보이는 것 너머의 그 무엇을 활자로 담아낸 시인의 언어를 소리로 담아낼 때에는 소리 내기의 고민보다 더 큰 질문을 낭송가는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낭송은 소리가 아닌 태도의 문제라는 것도 말입니다. 제게 큰 깨달음을 가져다준 이 무대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노인은 며칠간 자신을 괴롭히던 감기몸살 기운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워짐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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