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아바 꽃이 피었습니다
소년은 밤새 뒤척이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거리공연이 있는 날이면 집에 돌아와 씻을 여력도 없이 쓰러져 잠든 그였기에 더욱 기분이 이상했다.
-왜 자네는 시낭송인가?
노인의 말 한마디가 귓가에서 아니 가슴에서 떠나지 않은 탓이다.
2년 전 다니던 대학을 그만둔 계기는 다소 단순했다. 여느 대학생들이 그러하듯이 졸업에 필요한 학점관리에 충실했고 영어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학원 공부도 병행하며 성실하게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모처럼 가진 전날 절친과의 술자리가 다음날 리듬을 깼다. 기분도 전환하고 몸 상태도 추스를 겸 늦은 식사를 하고 가까운 영화관을 찾았다. 낮시간이어서 그런지 드문드문 관객이 앉아 있었고 컴컴한 상영관과 푹신한 좌석은 나름 쉬는 곳으로 도시에서는 괜찮은 공간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한 정보를 모르고 보는 영화는 가끔 주사위 던지기 같다. 포스터의 분위기만 가지고 영화티켓을 끊었다가는 과대 포장된 명절 선물을 풀었을 때와 비슷한 실망을 맛볼 수 있다. 초반의 이색적인 풍광은 영화가 제3세계의 아트무비임을 감지하게 했다. 엄청난 스토리를 기대하기보다는 미장센이나 눈요기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접었다. 주인공은 무언가 무기력해 보이는데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자신과 조금 닮아 보여 소년은 뒤늦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본인의 꿈이 현실에 좌절되어 무너지려는 순간 영화는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항구 끝에 서 있는 극 중 나이 든 사내는 주인공에게 참았던 재채기를 하듯 다그치고 있었다.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도전하기에 왜 주저하는가?
영화감독의 주위를 맴돌며 주저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지켜보다 답답한 마음을 쏟아낸 것이다.
이런 감동적인 대사들은 영어보다는 제3세계의 언어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때로는 낯설어서 더욱 설득이 되는 때가 있다. 비스듬히 좌석에 눕다시피 앉아 있던 소년은 그 대사를 듣자마자 몸을 고쳐 앉았다. 웅변같이 우렁찬 신파적인 대사가 소년에게는 현자의 속삭임으로 들렸나 보다.
-나는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살아가고 있나.
이 자문에 사로잡히자 소년은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날마다 불면과 대화를 나누며 밤낮이 완전히 바뀔 즈음, 소년은 고교시절 국어 선생님의 권유로 소월 전국 고교 시낭송대회에 나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주최 측이 정해준 소월의 시 중에서 단 한 편만 암송하면 되는 조건이라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시를 외우는 시간은 단 이틀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시어를 소리로 내면서부터 외웠던 시들이 이상하리만치 입안에서 헝클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라도 외워서 선생님에게 검사를 받아야 했고 그때마다 모호했던 시어들이 질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소년의 목소리는 너무나 딱딱하고 건조했기에 갑작스런 조치로 클라이맥스에서 손을 가슴에 올렸다 내리라는 주문을 하셨다. 소년은 제스처를 로봇처럼 몸에 장착했다. 대회가 있던 날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평소보다 무려 3시간이나 일찍 눈을 떴다. 대회가 열리는 시간까지 심장이 터져버릴까 봐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년에게 어머니는 청심환을 권했지만 거절했다. 대회 순서는 이름의 가나다순이라서 다행히 매를 먼저 맞을 수 있었다. 앞 순서의 참가자가 낭송 중 시어를 잊어버려 한참을 머뭇하다가 포기하고 내려온 탓에 더욱 소년은 긴장이 됐다. 무대에 오른 소년은 진행자가 스탠드 마이크의 높이를 고치는 동안 넓은 평야를 순간 떠올렸다. 수많은 양 떼들이 자유로이 풀을 뜯으며 노니는 상상을 순간 하는데 이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쾌하지 않았고 오히려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자 소년은 연습 때에도 못 느낀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에잇, 모르겠다! 제목을 말하고 3초가 지난 시점에 김소월이라고 또렷하게 말하고 시선을 관객석 2/3 정도 되는 지점에 고정했다. 이상하게 대회장의 공기는 소년의 한 행 한 행의 시어들을 편안하게 실어 청중에게 전해주었고, 우연히 마주친 심사위원의 시선은 소년에게 따뜻한 격려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연의 마지막 행 시어를 내뱉는 순간 주위가 소년을 포근하게 감싸는 기운을 받은 듯 미소가 지어졌다. 무대를 내려오자 비로소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선생님의 가벼운 격려의 포옹이 없었다면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결과는 대회에서 두 번째로 큰 상을 받았으나 소년은 무대 위에서 자신만이 경험한 독특한 느낌들을 한 동안 잊지 못했다. 그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학기 중에 틈틈이 시낭송을 소년의 SNS나 몇몇 대중적인 플랫폼에 선보였고 짧은 기간 구독자들과 조회수가 급등했다. 이에 용기를 얻어 소년은 제대로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다니던 학교마저 그만두고 시낭송 거리공연에 전념하게 된 것이다.
하얗게 지새운 소년은 커튼을 젖히자 베란다에 한동안 방치해둔 화분 속 구아바 나무가 보였다. 그때 머리맡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를 쥐고는 며칠 전 거리공연 후 우연히 만난 노인의 번호를 찾았다. 한참을 검지로 밀어 올리다 보니 '편의점'이라고 저장된 번호가 보였다. 이내 노인임을 알아차리고, 문자를 남기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이라고 적다가 무언가 어색해서 소년은 지우고 잠시 머뭇한 뒤 재작성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시 낭송하는 사람입니다. 꼭 다시 뵙고 싶습니다!
문자를 보내고 다시 고개를 들어 밖을 보자 아까 보지 못했던 구아바 나무의 우듬지에 팝콘처럼 몽우리를 터뜨린 구아바꽃이 피어 있었다. 꽃은 열매의 색과는 달리 어두운 가지와 대비되어 더욱 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