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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Mar 11.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4회

멀어질수록 더 분명 해지는 비밀들

4



사흘이 지나도 노인으로부터 답변이 없자 소년은 불안하기 시작했다.

직접 전화로 연락하지 않고 문자메시지로 제안을 한 것이 마음이 걸렸다. 내쪽에서 배려하는 것이 상대에겐 무례가 될 수도 있다는 마음이 들어 즉시 전화를 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휴대전화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중요한 통화를 할 때면 늘 스피커폰 방식으로 하곤 했다. 가까운 사이는 통화 시선이 중요하지 않은데 어려운 상대일 경우 거리를 둔 휴대전화에 시선을 두고 말할 수 있어 마치 마주 보고 대화를 하는 것과 비슷해 조금 덜 긴장되어서다. 노인의 통화연결음은 평범했다. 일곱 번쯤 울리자 음성메시지를 남기라는 기계음으로 넘어갔다. 노인과 전화연결이 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소년은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노인의 목소리를 기계를 통해 듣는다면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았다. 이번 통화시도는 어쩌면 노인에게 보내는 모스부호 같은 것이다. 

-선생님과 연락이 닿고 싶어요!


...엄마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언어의 강력한 분출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모든 잔재주와 꾸밈을 추방하고,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 말하자면 엄마의 감수성이라는 음역 안에 들어 있는 문장들에 적합한 온갖 자연스러운 다정함이나 넘쳐흐르는 부드러움을 표현하려고 하셨다. 엄마는 그 문장들을 적절한 어조로 공략하기 위해, 문장 이전에 존재하면서 문장을 구술하게 한, 하지만 단어 자체에는 표시되지 않은 따뜻한 억양을 찾아내셨다. 

소년은 책을 소리 내어 읽어나가던 중 잠시 멈칫했다. 소리 내어 책을 읽는 것은 소년이 낭송을 하기로 시작한 시점부터 줄곧 일기를 쓰듯 매일 하는 습관이 되어버린 연습이다. 조금 긴 호흡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미뤄둔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주인공의 침대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는 엄마의 낭독에 대해 주인공이 묘사하는 부분을 읽어나가다가 멈추어 허공을 쳐다보았다. 

-낭독만 그러할까. 낭송도 그렇지 않을까.

뭐라고 이유 있게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소년은 복잡해지면서 한편 명료해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려 이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천천히 스타카토로 백미 사이에 섞인 기장과 현미밥을 씹듯 음미하며 읽었다.

...그 억양 덕분에 엄마는 책을 읽으면서, 동사 시제에서 느껴지는 온갖 생경함을 완화했고, 반과거와 단순 과거에는 선한 마음이 깃든 부드러움과 다정함이 깃든 우수를 부여하셨다. 그리고 한 문장이 끝나면 다음 문장으로....

갑자기 소년은 서랍에서 형광펜을 꺼내 들고는 뒤이어 나오는 문장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읽어 가면서, 길이가 다른 문장을 균등한 리듬으로 만들었고 그렇게도 평범한 산문에 일종의 감상적이고도 연속적인 생명을 불어넣으셨다.

소년은 이 문장을 끝으로 멈춘 후, '감상적이고도 연속적인 생명을 불어넣었다'를 세 번이나 낮게 읊조렸다.

눈으로만 읽었다면 놓쳤을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이 들자 소년은 아찔했다.


책을 덮고 자리에 누우려다 문득 문자메시지가 궁금해져 휴대전화를 열어 보았으나 노인의 메시지는 도착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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