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숲오 eSOOPo Mar 10.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1회

소년, 노인을 만나다

1          



소년이 노인을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으나 그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노인이라 지레 판단한 것도 풍기는 외모가 아닌 그 후 둘이 나눈 수많은 이야기를 미루어 짐작한 소년의 추측일 뿐이다. 소년은 마지막 거리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즐겨 마시는 저가형 캔맥주 하나를 주저 없이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간다. 말을 주고받은 적은 없으나 안면이 있는 아르바이트생이라 신분증 제시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이미 세 개의 편의점을 지나친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이보다 앳된 소년은 주류를 살 때마다 지갑을 두 번씩 여는 것이 불편했다. 한 단계가 생략된 편의점을 나와 건너편에 보이는 공원 입구 벤치에 가 앉았다. 얼마 전 다친 검지를 피해 캔을 따려니 힘을 쓰기 좋은 중지가 적당했다. 손가락도 역할을 대체해 줄 스페어가 있는데... 맥주를 마시려 고개를 젖혔다. 깊어지는 여름의 밤하늘은 검다기보다는 오히려 짙은 파랑이었다. 오늘 처음 인식한 색이었다고 유난스러워하자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수술 후 눈을 떠 세상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슬픔도 기쁨도 아닌 정체 모를 눈물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색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위협이 되기도 한다는데... 그 어느 쪽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았다. 소년은 순간 낮에 공연하며 낭송한 시의 한 부분이 떠올라 낮게 읊조렸다.     



그대 역시 보다 위대해지려 했으나

사랑은 우리 모두를 지상으로 끌어내리고,

고뇌가 더욱 강하게 휘어잡네.

그러나 우리 인생의 활,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감은 부질없는 일이 아니네..

... 

인간은 모든 것을 시험해야 하리라. 천국적인 자들 말하나니

힘차게 길러져 인간은 비로소 모든 것에 감사함을 배우고

제 가고자 하는 곳으로 떠나는

자유를 이해하게 되는 법이네. *     

     


소년은 주로 공연의 낭송 리스트를 국내시로 구성한다. 그는 며칠 전부터 오늘 떠난 독일 시인의 기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연 후반부에 시 한 편을 낭송하며 추모하고 싶었다. 평소 좋아하는 시였지만 무대에서 공연한다는 건 다른 감정의 사용이었다. 같은 정서의 국내시를 낭송할 때와 달리 관념적인 시는 자칫 웅변으로 전달될 수 있어 조심스러운 시도였다.

오늘은 관객이 많지 않아 딱 그만큼만 기대하고 즐겼다. 나만의 방식으로 시인을 추모했다고 대견해하며 나머지 한 모금 맥주를 입에 가져가는 순간 앞에 누군가 서 있음을 알아차렸다.     

 -자네, 낮에 거리에서 시를 낭송한 청년이 맞는가?

 -아! 누누누 구 신지..

무대에서와는 달리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한 그로서는 당황했다.

 -요즘도 시를 낭송하는 이가 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한참을 들었네.

노인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오래된 유물을 발견한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감사합니다.

소년은 선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를 까딱했다.

 -처음엔 시가 궁금했는데 점차 자네가 궁금해지더군.

소년은 어찌 답할지 몰라 주춤하는 사이 노인은 주저하는 듯하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자네는 시낭송인가?

누군가 지나다가 이 소리를 들었다면 소년이 말한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만큼 소년이 지녔을법한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노인은 질문을 던졌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시 <삶의 행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