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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챌린지 35호

by 이숲오 eSOOPo

자존


김 언



마음 하나 뗐는데 말이 멋있다. 술을 따른다

멋있지 않아도 좋으니까 이걸 좀 세워달라. 술잔은 많다.

변명도 많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어느 술자리에서든 마찬가지

꼬리를 남기고 사라진다. 마음이 사라진다고 편안해질까?

몸이 사라진다고 정말 어두워질까? 나는 사라진 적이 없는

사람의 말을 믿고 따르고 의심하고 행동하고 자제하고

두둔해본 적이 없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다.

당신은 술을 따른다. 마음 하나 뗐는데


모두가 개인으로 돌아오고 있다. 한 사람씩 무기력하게 짖는다.

개가 없어도 괴롭다. 마음이 없어도

여러 동물들이 짖는다. 감정도 없이

나는 내 출생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걸 고향이라고 부를까 나라고 부를까

아니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 바깥의 짐승들에게

이거라도 세워달라고 몸 대신 일으키는 그것을 뭐라고 부를까?

나는 부른다. 어서 와서 앉으라고

벌써 일어나고 없는 그에게.




술을 멀리한 지 어언 오백 년 같은 오백 일이 훌쩍 지났다


술을 끊으니 술자리도 끊어졌다


술자리가 사라지니 친구들끼리 만나 호기와 너스레를 떨 기회도 사라졌다


맨 정신에 나누지 못하는 말들이 저 깊은 땅 속에서 쿨쿨 잠자다가 묻어둔 자리마저 잊었다


술이 있는 자리는 말이 넘치는 자리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술잔만이 아니고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각자 바구니 가득이고 와서 상대에게 억지로 안기는 자리


그간의 처리하지 못한 술자리용 말들이 산이 되어 버렸다


그곳에는 말토끼가 당근을 입에 물고 뛰어놀고 있고 말낙타가 허무의 사막을 외로이 건너고 있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몇 개의 감정이 사라지고 몇 개의 감성이 휘발된 것 같다


취하지 않고 저 흩날리는 꽃잎처럼 무수한 나날을 살아야 하는 것은 가장 무서운 이야기


술맛이 무슨 맛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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