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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놀기 1.  도시락에 작은 샹달프 잼 하나

닷새째 야근한 번아웃 직장인의 메마른 도시락에, 달콤한 잼을 넣어봤다

채소와 호밀 비스킷으로 구성된 어느 날의 도시락. 자그마한 샹달프 잼이 나를 살렸다.



의사는 약을 처방하며, 음식을 조심하라고 말했다.

"커피랑 콜라, 녹차도 안됩니다. 카페인은 다 안돼요. 술도 절대 안 됩니다. 맥주도 참으세요. 기름기 있는 것도 드시지 마세요. 특히 치킨 금물입니다. 지나치게 짜고 매운 것도 안됩니다."

하루에 커피를 기본 4잔씩 마시는 사람한테 카페인은 금물이라니. 그리고 스트레스를 매운 음식으로 자학적으로 푸는 평범한 대한민국 직장인에게 매운 것을 먹지 말라니. 주의 사항은 계속 이어졌다.

"스트레스를 피하셔야 됩니다. 잠도 푹 주무시고요."

지금 며칠째 제안서 때문에 야근 중인데, 게다가 내일부터는 예정되어있던 콘텐츠 마감을 해야 한다. 와중에 팀장은 윗선의 요청이라며 제안서 완성 날짜를 이틀 앞당길 것을 지시한 터였다. 윗선에서 중간 과정을 보고 싶다고 했단다. 그리고 흔들리는 내 시선을 피한 채, 오후 6시 30분에 칼퇴를 하셨지.... 나는 남아서 밤 12시까지 야근을 하고... 아니, 그런데요...

'저, 혹시 입원할 수는 없을까요?'란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왔지만 참았다. 그리고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 가서 쇼핑백 하나에 가득 찰 만큼 약을 받았다. 2주일치라고 했다. 약사 또한 카페인과 술은 절대 금지라고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가끔 커피 한잔이나 맥주 한 캔 마시는 것도 안 되나요?"

"그러면 치료가 늦어져요. 약 꼬박꼬박 드시고 빨리 나으셔야죠."

그때부터 십여 년 만에, 도시락 인생이 시작되었다.



의사가 지시한 대로 이런저런 문제성 있는 음식을 피하려면 도시락을 싸는 것이 제일 나은 해법으로 보였다. 스트레스로 얻은 이비인후과 질환에다 역류성 식도염으로 고생하고 있어서 뜨거운 음식도 먹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 직장인이 선택할 수 있는 점심 메뉴 중, <뜨거운 것> <맵고 짠 것> <기름기 있는 것> 삼단 콤보를 피해 갈 수 있는 메뉴가 얼마나 있을까? 처음엔 서브웨이에 가서 채소 듬뿍 넣은 샌드위치를 조합해 보고, 그나마 나물이 잔뜩 들어간 편의점표 다이어트 도시락에도 손을 댔지만 곧 지겨워졌다.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서러움도 더해졌다.

혼자 사는, 게다가 야근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비혼 1인 가구로서 밥을 지어 반찬을 하고 정성스레 도시락을 쌀 여유는 없었다. 고심 끝에 택한 방법은 재료들을 뚝딱 조합만 해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


1. 양상추와 케일 등 푸른 잎채소를 적당히 자르고 가끔 방울토마토나 크랜베리 같은 빨간색 아이템을 더한다.(식감도 좋고 예쁘니까)

2. 샐러드 드레싱은 회사 냉장고에 보관하고 그때그때 뿌려 먹는다.

3. 이케아에서 구입한 호밀 비스킷을 쪼개어 따로 담는다.

4. 샹달프 미니 잼 중 맘에 드는 맛을 골라 도시락에 함께 넣는다.

 


샹달프 미니 잼 얘기를 하기 위해 참 먼길을 돌아왔다. 그렇다. 나는 이렇게 빙 둘러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직설적으로 "샹달프 잼 패키지가 예쁘고, 가격도 적당해요!"라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쇼핑몰 운영자가 될 체질은 아닌가 보다.

샹달프는 프랑스 브랜드로, 사실 가향차도 잘 만든다. 언젠가 소개하겠지만 샹달프 망고그린티는 냉침용 차로 적당해 차 마니아들 사이에 입소문 나기도 했다. 잼은 설탕과 합성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는데, 유명한 개미지옥 아이허브(iherb.com)에도 입점해있다. 하지만 미니 잼은 아이허브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아래처럼 이렇게 오픈마켓에서 검색해서 구입하는 게 편하다.

오픈마켓에서 구입할 수 있는 샹달프 미니 잼이다. 낱개 말고 12개 세트 구입을 추천한다

여기서 뭔가 감이 오지 않는가? 1. 종류가 많다. 2. 어디선가 많이 본 거 같다. 바로 그거다! 


1번에 대한 답을 하자면, 금귤/ 라즈 베리앤 석류/ 블랙체리/ 블루베리/ 딸기/ 크랜베리 위드 블루베리/ 라즈베리/ 무화과/ 블랙커런트/ 후르츠/ 복숭아/ 파인애플 앤 망고 등등 12가지나 된다. (여기서 내 최애 잼은 복숭아다) 코스트코 같은 곳에서는 설날이나 추석이 되면 선물용으로 박스에 넣은 미니 잼 세트를 팔기도 하는데 1만 원 안팎.

2번에 대한 답도 해보자. 그렇다. 이 미니 잼은, 휴가로 어딘가 놀러 갔을 때 호텔 조식 빵 코너에 진열되어 있던 바로 그거다. 보통은 좀 더 저렴한 은박 포장의 Hero 잼이 더 많이 보이지만, 가끔 샹달프 미니 잼을 만나는 행복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호텔 조식은 모든 직장인의 로망이 아닐까. 아니 뭐 딱히 맛이 있어서는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5성급 호텔 조식도 찬찬히 살펴보면 미리 만들어 데워 놓은 음식류에 금방 만들어주는 에그 코너, 그리고 다양한 빵과 잼 종류가 있다는 것 정도다. 호텔 조식이 행복감과 관계가 있는 것은 그것이 놓인 상황에 기인한다. 하얗고 보송보송한 면 시트가 깔린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지금 막 일어났는데, 당장 출근을 안 해도 되고 방 정리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침밥도 누군가 준비해놨다. 심지어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 이렇게 많이 차려봤어~"의 태도가 감격스러운, 뷔페식이다. 걍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잠시 호텔 로비와 정원을 산책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오늘은 어디 놀러 가서 뭘 먹을까 행복한 고민만 하면 되는 상황이다. (지인 중 하나는 호텔 조식이 너무 좋아서 여행을 간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 샹달프 미니 잼은 바로 이런 행복감을 불러일으킨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냥 달걀보다 작은 잼 병을 보기만 해도 한없이 행복해지니, 사람도 결국 동물일 뿐이랄까. 병 치료를 위해 먹을 것을 한계치까지 제한하고,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채소를 씹으면서, 커피도 맥주도 없는 인생. 바삭바삭 메마른 도시락.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직장인의 행복 점심 만찬을 즐기러 다 떠나버렸다. 혼자 책상에 앉아 이케아에서 사 온 아무것도 아닌 맛(정말 아무 맛도 안 난다. 궁금하면 꼭 드셔보시라) 호밀 비스킷을 꺼냈는데, 요 앙증맞고 작고 '기여운'(귀여운 말고 기여운이다) 잼 뚜껑을 여니 복숭아 향이 솔솔 난다. 어제는 무화과 맛이었는데, 오늘은 어떨까. 기대하는 마음이 앞선다.

나는 그렇게 두 달 동안 무알콜 무카페인 무떡볶이로 버티며 결국 병을 이겨냈다. 의사가 "더 이상은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원한 캔맥주를 곁들여 최고 매운 떡볶이를 먹고 나서 샷 추가한 카푸치노 마실 생각에 흥분되어서. (사실 그 두 달 동안 무알콜 맥주 2캔 하고, 디카페인 커피 한잔을 몰래 마셨다. 의사 선생님 죄송합니다)



결론은 해피엔딩....인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으니, 그 이야기는 다음에 언젠가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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