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개념 제7강 계약의 취소
계약이 성립하고 효력도 발생했고 상대방이 채무를 이행했음에도, 그 계약을 물리는 것을 법이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정확하게는 계약이 대상이 아니고, 나의 의사표시를 물리는 것이다.[*] 가령 내가 그 땅 산다고 했는데, 그 말 취소할게 이런 식이다.
이는 계약의 성립 과정에서 어떠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 하자가 계약을 일률적으로 무효로 할 정도는 아니어서 계약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계약의 효력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이다.
이러한 취소사유에는 제한능력자, 사기, 강박, 착오에 의한 의사표시가 있다. 친족법상 혼인이나 입양, 인지에는 별도의 취소 규정이 있다.
제한능력자에는 미성년자, 피한정후견인, 피성년후견인이 있다. 제한능력자의 법률행위를 취소사유로 하는 까닭은 계약자치 원칙의 전제가 되는 의사결정의 자유를 그들이 충분히 행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도 비록 사기나 강박에 의해서지만, 실제로 어떤 법률행위를 하려는 의사는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에 그 법률행위는 유효가 된다. 하지만 사기나 강박으로 인해 의사결정의 자유가 침해되었기 때문에, 그 침해된 당사자에게 자신의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착오로 인한 의사표시는 왜 취소할 수 있도록 하였는가?
우선 착오가 일상생활에서는 빈번히 쉽게 쓰이는 용어지만, 법학에서는 그 개념에 대해 약간의 견해 대립이 있다. 견해 대립은 동기의 착오를 민법 제109조의 착오에 포함시킬 것인가의 차이에 기인한다. 동기의 착오란 의사표시를 하게 된 동기가 의사표시를 할 당시의 실제 사실과 다른 사실에 기초하였고, 표의자(의사표시를 한 사람을 뜻한다)가 그것을 모른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공장을 지을 수 있는 땅인 줄 알고 샀는데, 사실은 지을 수 없는 땅인 경우가 동기의 착오이다.
일단 여기서는 판례가 "표시의 내용과 내심의 의사가 일치하지 아니함을 표의자 자신이 알지 못한 경우"를 착오로 본다는 점과 판례의 정의에 따르면 동기의 착오는 민법 제109조의 착오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만 언급한다.
로마법에서는 착오로 인한 법률행위는 무효였다. 고대 시민법 시대에는 엄격한 형식주의가 지배하여 요식문언의 내용대로 효력이 발생했기 때문에 착오는 문제 되지 않았다. 그것이 공화정 후기에 들어 낙성계약이 발달하면서 오늘날처럼 착오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착오에 대한 처리는 구체적 타당성을 따라 처리했는데, 중요한 착오에 대해서는 무효를 인정했다.[**]
로마법에서 착오는 의사표시가 아니라 법률행위 해석의 문제였다. 낙성계약의 효력은 의사의 합치가 필요했고 표시는 의사를 실현하는 보조수단이었다. 착오가 있는 경우 그 의사의 합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계약이 무효로 되었던 것이다. 이는 로마법에서는 계약을 청약과 승낙으로 구분하지 못했고, 의사표시도 의사와 표시로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같이 착오를 의사와 표시의 불일치의 문제로 본 것은 독일의 사뷔니(Savigny)에서 기원한다. 사뷔니(Savigny)는 착오의 경우 표시에 대응하는 의사가 없기 때문에 그 의사표시가 무효로 되어 계약도 무효가 된다고 보았다. 로마법이나 독일 보통법처럼 착오 그 자체로 인해 계약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착오에 의한 의사표시가 무효가 아니라 취소할 수 있는 의사표시가 된다고 본 것은, 의사와 표시 가운데 표시가 의사표시 효력의 핵심이므로 표시행위가 있는 이상 의사표시는 유효하다는 견해, 이른바 표시주의(Erklärungstheorie)가 주장되면서이다.
그럼 처음의 문제로 돌아와, 착각은 너 혼자 해 놓고 도대체 계약은 왜 물리자고 하는 것인가?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문제는 계약이 구속력을 갖는 근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이 결정한 의사라는 점에서 근거를 찾는다면, 착오가 있을 때에는 자신이 결정한 의사는 계약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자신이 상대방에게 준 신뢰가 구속력의 근거라고 한다면, 그 신뢰는 계약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
전자에 의할 때, 계약의 성립이 인정되는 경우에도 계약의 구속력을 인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없다. 따라서 계약의 취소가능성을 착오자에게 부여한다. 다만 계약은 계약 내용의 중요 부분이나 본질적 사항에 대한 의사의 합치로 성립한다는 점(기본개념 제2강 참조)에서 그것을 벗어나는 범위에서는 착오가 있더라도 의사결정의 책임을 부담하여야 한다.
후자에 의할 때는 상대방의 신뢰에 정당한 근거가 없을 때, 가령 상대방이 착오를 유발한 경우나 상대방도 동일한 착오를 하고 있을 때에는 계약의 구속력을 인정할 실질적 이유가 없고, 따라서 착오자에게 취소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학원을 할 수 있다고 하여 사무실을 임차했는데 학원을 운영할 수 없는 법령상 제한이 있었던 경우, 임차인의 착오는 계약의 중요 부분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학원을 할 수 있다는 임대인의 확인 내지 중개인의 고지가 있었다면 상대방이 착오를 유발하거나 상대방도 공통의 착오를 하고 있는 상황도 된다. 이러한 경우에는 계약의 구속력의 근거를 자기결정이나 신뢰부여 어디서 구하든 착오자가 임대차 계약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함이 타당할 것이다.
취소로 인해 계약은 처음부터 효력이 없었던 것이 된다(민법 제141조). 계약의 일부분에만 취소사유가 있는 경우, 계약이 가분적이거나 계약의 목적물의 일부가 특정될 수 있고 나머지 부분만이라도 유지하려는 당사자의 가정적 의사가 있는 때에는 일부취소도 가능하다(대법원 1998. 2. 10. 선고 97다44737 판결). 일부무효에 관한 민법 제137조 단서를 유추적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취소는 계약의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 하여야 한다(민법 제142조). 예를 들어 A가 갑을 협박하여 X 토지를 매수하고, 다시 B에게 소유권이전등기를 넘겨준 상황에서, 갑은 B가 소유 명의자라고 하여 B에게 취소의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 상대방인 A에게 취소의 의사표시를 하고 B, A 순차로 소유권이전등기의 말소를 구하여야 한다.
무효인 의사표시도 취소할 수 있을까?
오래전에는 무효인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었다. 이미 무효인데, 취소의 효과도 무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911년 독일의 Theodor Kipp이 이중효론을 주창한 이래 오늘날에는 무효인 의사표시도 취소할 수 있다고 본다. 자연과학적 사고로는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죽을 수 없는데, 무효인 의사표시는 다시 무효로 만들 수 있다니.
그러나 무효와 취소는 해당 의사표시가 존재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각 요건이 충족되었는지의 평가 문제이게 때문에 경합할 수 있다.[*****]
One Point 법률용어
강박 : 고의로 나쁜 짓을 하겠다고 위협하여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는 행위. 의사결정의 자유를 완전히 상실하게 할 정도에는 이르지 않아야 한다. 의사결정의 자유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한 의사표시는 무효인 의사표시이고, 취소 사유가 아니다.
[*] 다만 민법 제140조에는 "취소할 수 있는 법률행위"라는 표현이 있어 법률행위가 취소의 대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 현승종·조규창, 로마법, 법문사 (2004), 436면.
[***] 송덕수, 민법주해 2권 곽윤직 등 편, 제109조, 박영사 (2012), 392-395면.
[****] 송덕수, 위의 책, 395면.
[*****] 김형두, 주석 민법(민법총칙) 제5판, 한국사법행정학회 (2019), 505-50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