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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어리 Mar 29. 2022

다신 사랑, 아니 출판 안 해

출판이 아니라 사랑이었나요?

앞으로 다시는 사랑 안 해, 하나 봐라

짝사랑하던 사람을 고백으로 잃고 걷던 봄날의 분홍빛 석촌호수길. 사랑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인정한 순간, 연인이었던 사람에게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울면서 전화했던 3호선 대화역의 밤공기. 눈물이 넘칠까 봐 감정을 삼키면서 다시는 사랑 안 할 거라 되뇌었던 마음은 결국 무의미해집니다. 어쩌면 사람은 좋고 싫음에 관계없이 같은 패턴의 행동을 반복하면서 살다가는 존재일지도 몰라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고백하는 이메일을 발송했던 저녁. 초조했던 밤. 출근해서 정신없이 부속품처럼 일하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전화받았던 다음날. 재킷 안주머니에 1등 당첨된 로또를 품은 듯 설렜던 그날. 그리고 다시 연락이 소원해진 채로 지냈던 수개월의 나날들이 생각나요. 전화기가 울리기를 바라며 다른 일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견디기 힘든 날에는 회사 앞에 찾아가 기도하면서 마음이 닿기를 바랐죠. 몇 번의 문자 메시지. 마음먹으면 만날 수 있었지만 참았습니다. 기다릴 차례였으니까요.


겨울이 지나고 얼음이 녹을 때쯤, 홍대입구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자는 연락이 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동안 겪었던 마음고생을 보상받는다는 안도감이 저를 뒤에서 끌어안았습니다. 긴장이 풀리는 바람에 감기에 걸릴 뻔했어요. 약속 당일에는 일찍 도착해서 우산을 접어놓고 카페 라테를 주문했어요. 늦게 와서 비를 털어대는 흐트러진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커피가 삼분의 일 쯤 남았을 때 마스크를 다시 올렸고, 우리는 마침내 만났어요. 시럽 펌핑 세 번 보다 달콤한 1일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꿈만 같아요.


적어도 우리는 이번에야말로 특별할 줄 알았습니다. 세 번 고백 끝에 사귀었던 첫 여자 친구와 가장 행복했던 날이 바로 사귀기로 한 첫날이라 말하면 사람들은 듣고 웃지요. 저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첫날에 행복의 정점을 지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날을 기점으로 더 높이 올라가는 사람도 세상에는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이번에도 저는 징크스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처음엔 기쁨과 슬픔 모두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 인생의 이 늦은 시기에도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뭉클했습니다. 야속하게도 우리는 언젠가부터 점점 축하할만한 일이 있어야만 연락하는 사이가 되어갔습니다. 정확하게는 그만큼 좋은 일이 드문 드문 일어났기 때문이었죠. 그보다 더 자주 있었던 사소한 보통 일, 안 좋은 일로 연락하기에는 왠지 모르게 어색했어요. 좋지 않을 때일수록 저 혼자서라도 열심히 하면 상황이 변할 줄 알았어요. 할 수 있는 한 정말로 최선을 다하고 진심을 쏟아부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고개를 들고 깨달았습니다. '나는 제자리인데, 페이지는 이미 다음장으로 넘어가 있구나.'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은 한결 후련해요. 여전히 문득 시선을 내리고 숨을 멈춘 채로 온 몸이 굳는 순간이 종종 있지만요. 또 수많은 밤이 지나고 내년 이맘때쯤에는 그런 때도 있었구나 되돌아보며 아무렇지 않게 추억할 것 같아요. 제목을 쓸 때도 생각했지만, 출간 계약서에 사인한 날부터 책이 매대에서 쓸쓸히 사라지는 계절의 변화는 마치 사랑의 열병을 앓고 낫는 과정과 닮았어요. 에리히 프롬이 쓴 글에 따르면, 단숨에 불이 붙었다가 식는 사랑은 실패라는데 그 이유를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받으려고 애썼던 만큼 충분히 줬는지 반성도 되어요. 저는 많이 퍼줄 만큼 훌륭한 저자는 아니었습니다. 이러면서 사랑을, 아니 출판을 배워가는 거겠죠.



위 글과 사진에 등장하거나 암시하는 인물, 회사, 기관, 지명은 실제와 관련이 없는 픽션입니다.




<손으로 쓰고 발로 알립니다>

초보 저자가 첫 책을 출간하고 경험한 절망과 기쁨을 자조와 해학으로 승화합니다.


<첫 화 읽기>

https://brunch.co.kr/@sardine/73


<출간 이후의 삶>

https://www.instagram.com/sardine.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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