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지심, 열등감, 잘난 친구
'덕통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종영 후 6개월이 지나서야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를 정주행했다. 회사 일로 SNS 트렌드와 인기 광고를 조사하면서 2021년에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인기였는지 이제야 파악했다. 그전까지는 '스우파'는 몰라도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라는 말이 유행했음을 아는 정도였다. 이제라도 알고 싶었다. 스우파가 도대체 뭐길래 대한민국을 흔들었는지. 궁금한 마음으로 1화를 보고 난 뒤 화가 났다. 이 재미있는 시리즈를 나만 빼고 온 국민이 다 보고 감동하고 열광한 지 한참 지나서 혼자 따라잡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충 인기 요인만 살짝 맛보고 넘어가려다가 '입덕의 늪'에 제대로 빠졌다. 한 회당 2시간가량이나 되는 프로그램을 마라톤을 하듯이 달렸다. 스우파 폐인이 따로 없었다. 다음 화가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면서도 조급했다. 무엇이든 뒤처지는 기분이 들 때마다 분하다. 화가 나는 기준은 순전히 나의 관심 여부다. 예를 들어 2020년부터 2021년까지 방영된 드라마 펜트하우스는 세 번째 시즌까지 나왔음에도 한 편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지 않다.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나, 이 또한 한 편이라도 재미있게 봐버린다면 혼자 안 본 억울함에 기절할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이런 분한 심보를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친구가 말해줬다. 유행이 한참 지난 뒤에 혼자 정주행을 해봤자 재밌다는 이야기를 할 사람이 없으니, 타인과의 소통 욕구를 채우지 못해 화가 나는 게 아니냐고. 꽤 그럴싸한 추측이라 진실에 가깝다고 인정해버렸다. 처음엔 센 여자들의 기세에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눌려버렸다. 초반 기싸움이 끝난 뒤로는 경쟁의 고됨과 패배, 탈락의 아픔으로 거의 매화마다 우는 댄서들을 보며 나도 궁상맞게 눈물을 흘렸다. 삼십 중반 넘어 매일 저녁 혼자 스우파를 보며 눈물 짜는 내 인생.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남긴 주옥같은 어록도 나머지 공부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따라잡았다.
"근데... 본인 24살에 뭐하셨어요?" YGX 리더 리정이 상대 크루를 도발하는 말에 뼈를 맞은 듯 뜨끔했다는 시청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팩트로 두들겨 맞는 기분보다는 리정의 자신감이 멋지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24살이면 내가 취업 준비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환학생 생활을 하겠다며 부모님 돈을 유로화로 바꿔 펑펑 쓰던 철없을 때였다. 17살 때부터 정상급 댄스 크루인 저스트 절크에 스카우트된 리정. 미국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이름을 날린 일류 댄서와 나 자신을 비교한다고 해서 딱히 타격감이 들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20대에 이렇다 할 성취를 하기보다는 취업 문제로 좌절하거나 다양한 고민으로 방황하는 게 자연스러우니까.*
열등감은 오히려 엉뚱한 인물에게서 찾아왔다. 그것도 댄서들의 댄서이자 춤꾼들의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크루 프라우드먼(PROWDMON)의 리더 모니카에게서. 우승을 차지한 크루 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보다 경력은 짧지만, 나이로는 '언니'인 그는 자기만의 색깔이 확실한 사람이자 춤, 퍼포먼스에 있어서는 완벽주의자 그 자체였다. 경연을 준비하며 원하는 만큼의 완성도가 나올 때까지 강도 높은 연습은 기본. 크루원들에게 호통치는 모습도 본인에 따르면 방송에서 공개된 일부에 불과하다고 하니 보통 엄격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리더로서 사랑받는 이유는 그만큼 확실한 실력을 보여주고 최선의 결과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댄서들의 존경을 받는 댄서, 자신만의 색깔과 실력을 갖췄다는 이유보다도 모니카라는 사람이 놀라웠던 이유는 그가 방송에서 밝힌 나이와 이름 때문이었다. 올해 37세인 그의 본명은 '신정우'다. 수십 시간이 넘는 방송분을 챙겨보는 동안 일종의 경외감을 느끼게 만든 사람이 나와 같이 1986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이 '심정우'인 나와 몇 획 차이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24살에 뭐하셨어요?"라고 묻는 리정의 말보다도 모니카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는 커다란 질문으로 다가왔다.
'근데... 나는 37살에 뭐 하고 있는 거지?'
패션 회사 디자이너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정우'. 본업인 디자인보다는 상사의 커피를 제때 타지 않았다는 이유로 혼나는 현실에 좌절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운 춤을 놓지 않았다.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는 평일을 제외하고 주말에도 크루원으로 활동하던 당시에 어째서 자신은 춤을 직업으로 삼지 않는지 의문을 품고 결국 직장을 그만두었다. 뒤늦게 시작한 댄서로서의 커리어는 당연히 초라했다.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댄서들로부터 배척도 많이 받았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다이어트 댄스 강사로 밑바닥부터 시작한 그는 결국 지금의 '모니카'가 되었다. 늦게 피는 꽃의 전형적인 예다.
강동구 길동에서 패션회사 인턴으로 사회 일을 시작한 '심정우'. 핑킹가위로 옷감을 잘라 샘플북을 만들고 교외 공장에 내려가서는 시린 손으로 배송 박스를 쌌다. 패밀리세일 날에는 온종일 허리가 아프도록 짐을 옮기던 28살의 그에게 꿈 따위는 없었다. 어디든 붙여주는 곳에 들어가야 했다. 서류와 면접을 50번 넘게 탈락한 끝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끌어안은 정규 사무직 합격 안내문은 인생의 전부였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회사를 떠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두려웠다. 꿈이 없는 반발심은 그저 회피하고 싶을 뿐인 마음. 이리저리 부서를 옮겨 다니며 어떻게든 37살까지 회사를 다니고 있음에도 이렇다 할 경력은 없다. 지기도 전에 개화조차 못한 전형적인 예다.
성공한 타인에 비해 자신이 뒤떨어진 것 같은 감정을 아예 못 느껴도 자기 객관화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비록 행복해지는 방향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열 살 넘게 어린 사람보다는 오히려 동갑내기의 현재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드니 비교해서 좋은 점도 분명 있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나 혼자 너무 늦게 봐서 화가 난다. YGX의 리정, WAYB의 노제, HOOK의 아이키, HolyBang의 허니제이, CocanButter의 리헤이, PROWDMON의 모니카, WANT의 효진초이, LACHICA의 가비와 그들 크루의 매력을 유난 떨며 나누기에는 다소 늦었다는 사실이 분하다. 올해 37살이라는 모니카, 아니 신정우라는 사람을 이제야 알아서 속상하다.
자격지심과 열등감, 잘난 친구.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에서 모니카가 밝힌 춤 실력의 비결이다. 열등감도 자격지심도 있다. 친구는 아니지만 잘난 사람도 많이 안다. 이만하면 나도 향상의 조건을 꽤 많이 갖췄다. 일로 삼아서 성공하고 싶은 '그것'이 뭔지만 찾으면 된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면 된다. 너무 늦은 때는 없다는 말은 거짓말. 뒤늦고 뒤처져서 분한 마음을 인정하고 지금부터라도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싶다. 이 방법밖에는 없다.
* 노동절인 오늘 이 글을 어제에 이어서 쓰는 와중에 한 재테크 유튜브에 출연한 31세 여성의 이야기를 들었다. 24세에 2천만 원으로 부동산 경매를 시작해서 부채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30억 자산을 모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춤'이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에서 자산가가 되었기 때문인지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 나이에 무엇을 이루었냐도 중요하지만, 그 때라도 무엇을 시작했는지 또한 중요한 게 아닐까. 게다가 생각해보니 유튜버 신사임당 주언규 씨는 아무래도 나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은 것 같다. 큰일이다. 오늘도 친분은 없는 잘난 친구를 알아간다. (2022-05-01)
** BGM : CL - 닥터페퍼(퍼포먼스 : 프라우드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