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게으른 여행자 시점 : 홍콩
게으른 여행
여행이 일생에 한번뿐인 버킷리스트적 행사였던 어른들에게는
이 말은 감히 용서할 수 없는 속 좋은(혹은 없는) 소리.
"게으르고 싶으면 집에서 쉬지 뭐하러 비행기까지 타서는...!"
여행은 이제 Once in a lifetime event 가 아니다.
떠나고 싶다고 생각이 들 때,
내 주머니 사정에 맞는대로
그 계절에 마음이 끌리는대로
떠날 수 있다.
혼자면 혼자라 좋고
둘은 둘이라 좋다.
회사에 다니게 된 이후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재료가 달라졌다.
어떻게 재밌게 살까 라는 주제는
꽤나 사치스러운 고민일 수 있다.
왜냐 하면 아무도 답을 못 찾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이엔 이런 재료가 오간다.
어떻게 하면
나만의 공간/여행에서
더 잘 쉴 수 있을까?
이 생각을 나누며
깔깔대며 회사에 지친 마음을 달래곤 한다.
누가누가 더 잘 쉬었는지 웃픈 자랑을 하면서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함이 아니다.
가짜 유토피아를 꾸며내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지금 이 현실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함이다.
왜냐 하면 우리는 이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살아가야 할 각자의 이유들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지금은)
태어나 처음으로
여름같은 여름이 필요했다
여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비오듯 땀이 쏟아지는 동남아는 딱 질색이었다.
근데 왜일까
여름을 여름답게 느끼고 싶다고
생각해버렸다.
하루종일 통제가 잘 된 실내환경에서
(8시간이 뭐람) 15시간, 16시간씩 일하면서
나는 바깥은 봄이라는 바람을,
바깥은 여름이라는 공기를 잊었던 걸까.
내 발로 여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고 싶었나보다.
습하고 꿉꿉하면서도 타들어갈 것 같은 햇살을
피부로 느끼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떠났다.
여름의 도시.
숨쉬는 거대 한증막.
홍콩으로 말이다.
게으른 여행자에게
게으를 명분이 생기는 도시
여름을 느끼고 싶어서 홍콩으로 왔다만
정말 공항에서 나온지 1초만에 생각했다.
이런.
망할.
여름.
근데 이내 곧 웃었다.
뭔가 좋은 명분이 생긴 것 같아서.
게으르고 싶어도
게으르지 못한 서울의 나를 잊고
충분히 게으를 명분이 생기는 것 같아서였다.
진정 게으른 여행자는
기다리지 않는다.
홍콩의 소호거리를 지나가도
정말 '지나칠' 수 있다.
어렵게 여기까지 나왔는데
그래도 사진 한장은 기념으로 박아줘야지.
그런 말은 잠시 잊어도 좋다.
너무 더우니
나는 그냥 눈으로 보면서 지나칠래
조금 게을러도 된다.
진짜 이 도시에 사는 사람처럼
쿨하게 지나갈 수 있다.
그것도 나에겐 여행이니까.
그 공간에 포함되지 않고 먼 거리에서 봐야만
눈에 담기는 것들도 생기니까.
게으른 여행자에겐
관광지도가 필요없다
발 닿는대로 걷다보면
대중의 마음이 아닌
내 마음에 쏙 드는 장소가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라.
꼭 그렇더라.
유명 관광지를 찾기 위해
지도를 보며 이동하면
절대로 그 옆의 작은 골목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근데 걷다가 걷다가
작은 골목들을 헤매이다가
충분히 그 매력을 느끼다 보면
유명 관광지가 뿅- 하고 눈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나는
지도를 잘 보지 않는다.
정말 알지 못하면 찾아가지 못하는
3박4일 내내 헤매도 못찾을 법하게 숨겨진
작은 골목의 카페, 상점들만 최소한으로
구글맵에 표시해놓는다.
지나가다가도 우연히 볼 수 있는
눈에 띄는 거대 관광지는 어떻게든 보게 되니까.
그리고는
도시속으로
"게으르게"
그냥 걷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가 좋았다.
피크트램도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도
디즈니랜드도 없이 보낸 홍콩이란
유명 음식점도
비첸향 육포도
명품 쇼핑도 하지 않은(못한) 홍콩이란
대체 그럴거면 홍콩에
뭐하러 갔니?
라는 말을 들을 법하지만
있는 그대로가
참 좋았다.
미슐랭의 도시 홍콩에서
미슐랭은 가지 못했어도
한국에 없는 카페앤밀무지(Cafe&Meal MUJI)의
소박한 오키나와식 한 상이 더 좋았고
홍콩 로컬 친구들이 알려준
홍콩의 을지로 같은 골목 상점들이 더 좋았다.
홍콩 주차장 한칸이
8억원에 팔렸대!
같은 실없는 뉴스거리가
사실은 지나치던 아무개 골목길 부동산에서마저
느껴져서 참 좋았다.
준비없이 돌아다닐 때 가끔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역사적 지식이 필요한 곳도 있다.
배경설명이 여행을 풍성하게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가끔은
어떠한 지식도 없이
도시를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도 좋으니까.
지식이라고 쓰고
편견이라고 읽는 나의 여행은 그렇다.
블로거가 올린 예쁜 공원,
인스타그램이 알려준
그 도시의 최고 핫플레이스는
모르고 마주쳤을 때 더 큰 기쁨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니 가끔은
게을러보자.
게으르게 느껴보자.
게을러야 비로소 찾아오는 것들이 있으니까.
게으르고 충만한 여름이 필요한 당신에게,
감히 나는 홍콩을 추천해본다.
여름의 한복판에서
2018년 6월 19일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