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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Dec 01. 2021

‘굽은 마음’과 ‘도’

2. 두 번째 소경 이야기 - 우물 안 개구리


다시 장님이 찾아왔다. 전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이젠 자신도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고 했다. 자신이 느끼고 지각한 모든 것이 깡그리 무시당한 기분이라 한동안 속상했는데 이젠 그 억울함이 좀 풀렸기 때문이란다. 그러더니 장님이 나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동공에 나의 동공이 겹쳐졌다. 이심전심 이리라.

그가 물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에서 벗어났느냐고. 우물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 했다. 나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다만 우물을 빠져나갈 방법이 거기, 이야기 속에 있을지도 모르니 함께 ‘우물 안 개구리’를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장님과 나의 동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우물 안 개구리’에 관한 고사는 <장자> 추수 편에 실려 있다. 가을물이 모두 모여든 강에서 도를 터득했다고 자부하던 황하黃河의 신 하백河伯. 그는 불어난 물을 따라 흐르다 북해에 이른다. 그곳에서 넋을 읽고 북해를 바라보던 그는 북해北海의 신 약若에게 고백한다. "옛말에 에 대해 백 번 들으면 저보다 나은 이가 없는 줄 안다고 한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군요."라고. 그러자 북해의 신 약이 답한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 이야기를 할 수가 없지요. 한 곳에 갇혀 살기 때문이오. 여름 벌레에게는 얼음 이야기를 할 수 없지요.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오. 마음이 굽은(曲) 선비에게는 도(道)를 이야기할 수 없지요. 한 가지 가르침에 얽매어 살기 때문이오. 지금 당신은 좁은 강에서 나와 바다를 보고 비로소 당신의 미미함을 알게 되었소. 이제야 당신에게 큰 이(理)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구려. (장자, 외편, 추수, 17장, 현암사)          


대개 사람들은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렇다면 우물에서 바다로, 여름에서 겨울로, 시공간의 폭, 즉 외적 환경의 폭이 확대되고, 한 가르침에서 다양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식의 폭이 확대되어 가면 우리는 모두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 ‘도’를 얻고 ‘이’를 알게 되는 것일까. '도'가 미미함을 깨닫고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라면 우물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를 보고 시야를 넓혔다는 것이 도의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아닌 듯해서다.


불현듯 ‘한 우물을 파라’는 속담과 관련한  <장자>에 실린 고사 한 편이 겹쳐 떠오른다. 이십 대에 쇠 띠 장식을 시작해 오직 그 일에만 집중해 육십 세에 도를 터득했다는 한 노인에 대한 이야기다. 한 우물이라도 깊게 파다 보면 궁극에는 도에 이른다고 했다. 사실 성현들은 늘 그렇게 말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추수(秋水) 편에선 정반대로 한 곳, 한 철, 한 가르침에 얽매어 있지 말고, 우물 밖으로 나와 바다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일까. 모순처럼 들린다. 기질, 또는 상황에 따라 도에 이르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도’와 우주의 이치를 깨닫는 ‘도’에는 차이라도 있다는 것일까. 둘은 전혀 다른 ‘도’일까. 아니면 다른 듯 보이지만 실은 같은 ‘도’일까.


정황은 잘 몰라도 사람들은 두 속담을 각자의 삶의 정황에 비추어 별다른 모순 없이 받아들이며 시의적절하게 잘 적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모순 사이를 헤매며 아주 깊은 혼란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물을 더 깊게 파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물 밖으로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둘 사이를 관통하는 지점을 찾아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해야 할까. (사실 어쩌면 한 우물만 팠다는 그 노인도 삶의 한 시기에는 이런 내면의 혼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두 경우엔 분명 정황이 다르다. 우물을 ‘파다’와 우물에‘갇히다’의 차이다. 능동과 피동의 차이다. 다시 말하면 주체의 얽매임 여부가 다르다. 그렇다면 우물 안 밖의 차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우물을 파더라도 거기 얽매어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는지 모른다. 자신의 미미함을 깨닫고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였는지도.


'한우물을 파라'라는 고사에선 사람들이 노인의 띠 장식에 감탄하며 그 비법을 묻자, 노인은 답한다. "자신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바보다. 단지 좋아하는 일을 만나 오래 집중했을 뿐이다."라고. (노인에겐 자신의 미미함에 대한 자각이 있다. 노인도 어쩌면 한 우물을 땅 속 깊이 파 들어가 깊은 바다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우물 안 개구리’ 하백좁은 강에서 스스로 도를 안다 여겼지만 바다로 나와 보니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미미한 존재임을 깨달았노라 고백한다. 고백을 듣고 북해의 약은 하백과 더불어 ‘도와 리’를 이야기할 만하다고 했으니 '도'의 전제 조건은'자신의 미미함을 아는 것'에 있지,  우물 안과 밖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물론 외적 환경의 변화와 인식의 폭의 확대가 굽은 마음을 무너뜨리는 촉발점이 될 수 있다. 자신의 미미함을 깨닫게 하고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잉태하는 공간으로 말이다. 그러나 모두가 바다에 이르렀다고 해서 하백처럼 깨닫게 될까. 오히려 자신의 아집을 극대화하는 꼴로 귀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보인다. ( 어쩌면 장자가 말한 그 바다에 아직 이르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표면적으로 보면 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도에 이르지만,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렇다면 ‘도’란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미미함을 깨달았는가의 여부로 귀결된다. 결국 마음의 문제였다. 그래서 ‘굽은 마음’으로는 도에 이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장자는 '도와 리'를 아는 전제 조건으로 굳이 '우물과 바다', '여름 벌레와 얼음'을 등장시킨 것일까. 이 비유가 외물의 단순 비교가 아니라 마음의 정황을 상징하는 우화 기법이라면 도대체 삶의 어떤 심리적 정황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와 자신의 미미함을 깨닫는 것. 이 둘은 도대체 어떤 관계를 는 것일까.  

  

 우물 닫힌 공간이라면 바다는 열린 공간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방식대로 세계를 해석하고 살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굳이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의식을 확장할 필요를 느끼지도, 자신이 우물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쉽게 자각하지 못한다. 정해진 가치 체계와 절대적 기준을 믿고 충실히 따르며 그 질서 안에서 아무런 갈등 없이 안정감을 느끼며 편히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존에 믿고 따르던 가치 체계 내 인과 법칙이 예상처럼 작동되지 않을 때 일어난다. 장님이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 기둥이라고 우기는 상태가 우물의 시공간이라면, 바다의 시공간은 무수히 많은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며 서로 다른 것이라고 우기며 격렬하게 싸우는 현장이 된다. '우물'이 한 개인 또는 집단의식에 갇혀 고착화된 상태의 인식이라면 '바다'는 그러한 인식들이 사방에서 모여든 정보의 광장으로 다양한 관점이 요동치는 혼돈의 광장인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혼돈의 바다에 이르면 필연적으로 고통에 처한다. 자신이 믿어 온 가치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심리적 관점에서 보면 바다는 나의 의식과 타인들의 의식이 거대한 충돌을 일으키는 현장인 동시에  나의 내면. 즉 나의 의식과 무의식의 혼돈상을 상징하는 공간일 수 있다. 나의 무의식은 종종 외적 타자로 나타나 견고하게 고착된 나의 아상을 무너뜨리는 도구가 된다. 타자를 나의 거울상이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바다는 내가 의식하고 있는 나가 아닌 무수히 많은 다른 나, 나의 무의식을 대면케 하는 공간인 것이다.


또한 여름 성장의 시공간이라면 겨울은 죽음의 시공간이다. '여름철 벌레'가 생명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여름의 시공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면 '얼음'은 생명체가 사라지고 무형으로 돌아가는 겨울의 시공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사는 일이 술술 풀리며 생을 긍정하며 환희와 기쁨을 누리는 시간이 여름이라면 고통과 시련 속에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며 삶을 부정하게 되는 시간이 곧 겨울의 시간이다. 생명을 지닌 벌레는 치열하게 살지만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무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깊게 자각하지 못한다. 이를 자각하려면 자신이 믿고 확신했던 것들이 우르르 무너지는 경험 속에서 생에 대한 부정과 회의의 시간을 거치며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깨닫게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심리적 죽음이자 '무'를 체득하는 겨울, 곧 얼음 상태의 시공간인 것이다. 장자가 굳이 여름철 벌레와 얼음을 대비한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도를 알 수 없다고  '굽은 마음'이란 무엇일까.

'굽다'는 ‘곧다’의 대립어 마음이 휜 상태를 뜻한다. 마음이 갈고리처럼 휘어져 왜곡이 일어난 상태라 할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무수한 겹겹의 관점을 알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마음의 왜곡이 일어난 상태이기도 할 것이다. 이를 아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 한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마음 안에는 빛이 들어올 수 없다. 자기 그림자에 파묻힌 상태로 어둡기 때문이다. 외부 대상도 자기 그림자를 투사해 바라보기 때문에 대상도 왜곡되어 보인다. 한 가르침에 얽매여 있다는 것 자신이 알고, 믿고 있는 가치체 그것만이 옳다고 우기며 집착하고 있는 상태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속엔 상대와 자신을 끝없이 비교 평가하며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널뛰 오가는 마음도 숨어 있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대립하는 한쌍이기 때문이다. 모두 굽은 마음 작용이다. 반면 '곧은 마음'이란 마음이 수평을 이룬 상태이다. 수평의 마음에는 대립하는 짝이 있을 수 없다. 우월감도 열등감도 사라진 마음이다. 갈고리처럼 휜 마음의 공간에서는 감정의 물도 고여 썩지만 물이 자연스레 흐르는 공간에서는 감정도 자연스레 흐르게 된다. (감정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감정들을 바라보는 힘도 생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찰나임을 전제해야 한다.)


혼돈의 바다에서 한바탕 격렬한 싸움이 끝나고 나면, 결국 고집하던 ‘나’ 즉 나의 에고를, 나의 관습적 인식들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곧 집착이 소멸하는 순간이자 심리적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자신의 미미함을 깨닫게 되는 시간인 동시에 자신이 고집해 온 상에 대한 얽매임으로부터 자유가 시작된다. 인간은 이 자각을 통해 '존재' 그 자체로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주체가 탄생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때 자신의 미미함을 자각한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모든 만물에 대해 느끼는 진지한 겸손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더불어 참된 이치. 즉 '리'를 이야기할만하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장자의 도는 집착이 소멸해야 도에 이른다는 부처의 진리와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또한 미미함에 대한 깨달음이  참된 이치, (理)를 아는 것의 시작이라고 하니 이는 무지의 지’를 역설한 소크라테스의 깨달음과도 통한다. 무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자각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로도 이어진다. 플라톤은 참된 앎을 깨닫고 나면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가 동굴 안의 그림자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장자의 어법을 따르면 동굴 안 그림자는 굽은 마음의 상태로 보아 온 우물 속 세계일 것이다. 장자가 우물 밖으로 나가 바다를 인식하라 주문했듯 플라톤은 참된 세계를 보려면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모두 자신의 미미함을 깨닫게 되면 왜곡된 그림자의 세계가 사라지고 투명한 빛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덧붙여보자. 창세기의 첫 구절은 왜 “흑암이 깊은 어둠 위에 있을 때 수면 위에 영이 운행하며, 이 있으라 하는 빛이 있었다"로 시작하는 것일까.(창 1:2-3) 동굴 속 그림자만 보던 자가 동굴 밖으로 나와 을 만나는 순간도, 갇힌 우물에서 나와 바다를 인식하며 자신의 미미함을 깨닫게 된 순간도, 수면 위의 영이 운행하고 하나님이 을 내어 놓는 순간을 인식했을 누군가의 순간도, 어쩐지 그리 다르게만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모두를 인생의 겨울 지나 다시 봄을 맞는 순환의 여정에서 새롭게 만난, 즉 마음의 눈을 뜨게  개안의 한 여정으로 인식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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