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뭉게구름 Dec 10. 2018

채색의 즐거움

엄마가 24색 크레파스만 사줬어도
지금 화가가 되어있을 텐데...

친구에게 미술을 시작해 보라고 하면 농담처럼 돌아오는 답변이다. 요즘 아이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24색 크레파스는 부의 상징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12색 또는 18색에 만족해야 했다. 요즘 컬러링북이 유행하면서 72색 색연필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시대가 많이 바뀐 것 같다.

학창 시절 미술 시간을 떠올려 보면 먼저 밑그림을 스케치한 후 그 위에 색을 칠해 채워나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스케치가 제대로 안되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스케치는 그림의 설계도로 아주 중요하다. 19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는 채색을 전혀 안 가르치고 스케치 교육만 했다. 석고 데생만 몇 년을 한 후 시험에 통과된 사람만 모델을 놓고 인체 데생을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얼마 전까지 미대 입시에서 석고 데생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릴지 분명한 생각 없이 일단 시작부터 하거나, 채색 과정에서 얼마든지 스케치를 수정할 수 있다. 또한 채색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연이나 예상 밖의 상황을 활용하여 원래 계획과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케치 실력이 없다고 좌절하거나 채색 과정으로 넘어가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나 역시 워크숍을 듣기는 했지만 스케치는 아직까지 자신 없다.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나도 몰랐던 색에 대한 감각과 채색 과정의 즐거움이다. '색'은 재료와 혼합 방법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또한 주변에 어떤 색이 있느냐에 따라 같은 색깔도 느낌이 다르다. 아무튼 스케치보다 채색이 훨씬 창조적이고 다이내믹한 과정인 것 같다.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 표현도 보다 쉬고 개성적으로 할 수 있다.  

앞서 프랑스 아카데미 사례를 소개했듯이 19세기 중반까지의 고전 미술에서는 채색은 자연의 색을 그대로 옮기는 과정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작가의 창조성이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 미술로 넘어오면서 고흐의 해바라기와 같이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거나 마티스는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알록달록 원색으로 칠해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색면 추상주의 작가 마크 로스코(1903-1970)는 형태 없이 오로지 색으로만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년
마크 로스코 <오렌지 레드 그리고 오렌지>


미드나잇 블랙, 라일락 퍼플, 버건디 레드 … 요즘 새로운 스마트폰이 출시될 때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색상이 등장한다. 옛날 휴대폰 시절과 비교하여 확실히 색상이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상품의 색상을 결정하는 전문가를 컬러리스트(colorist)라고 한다.


그렇다면 컬러리스트처럼 색채에 대해 잘 알아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우리가 색을 구분하거나 알아보는 데는 색의 세 가지 성질이 깊이 관여한다. 명도, 채도, 색상이 그것인데 중학교 때 미술 필기시험을 위해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명도는 색의 밝고 어두운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순수한 노란색은 파란색보다 명도가 높다. 채도는 색의 맑고 탁한 정도를 뜻한다. 색상은 명도나 채도와 상관없이  빨간색, 파란색처럼 색을 구분할 수 있게 하는 성질이다.  


우리가 그림을 그릴 때 보통 2가지 이상의 물감을 섞어서 칠한다. 이때 물감에서 색상, 명도, 채도를 각각 분리해 조절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색의 3요소 중 한 가지를 변화시키려 하면 다른 것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파란색과 노란색을 섞으면 초록색이 나온다고 미술시간에 배웠을 것이다. 실제로 두 색을 섞어보면 그때마다 미묘하게 다른 초록색이 된다. 이 미묘함이 작품에서는 큰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결국 색을 혼합할 때 "화학 공식처럼 A 색상을 만들기 위해 B와 C 물감을 2대 1로 섞고 물은 10방울 떨어뜨려야 해"라고  누가 가르쳐 줄 수도 없고 외워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같은 색상도 주변에 어떤 색상이 있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아래 그림에서 보면 빨간색은 연두색의 영향으로 주홍색 느낌으로 변했고 연두색은 노란색 느낌이 강해졌다.                                                  


백남원92013), 채색의 기술, 연두m&b


그림 속에서 수많은 색깔들이 조화를 이루고 때로는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색의 조화를 강조하면 통일감이 있고 차분한 느낌을 주나 지루해질 수 있고, 변화만 있는 그림은 산만하게 색들이 충돌한다.  그래서 색들 간의 변화와 통일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야 좋은 그림이 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가 균형점인지  정답은 없으며, 오로지 화가가 자신의 의도를 잘 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지점이 균형점이 되는 것이다.


원래 질문으로 돌아와서 컬러리스트같이 색채 이론에 대해 잘 알아야만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채색 과정은 공식도 정답도 없다. 오직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가며 색에 대한 감각을 키워가는 방법밖에 없다. 자꾸 느끼기 전에 배우려 하지 말자. 일단 느낌대로 칠해보고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지, 그러면서도 뭔가 포인트가 있는지 계속 살펴보고 수정해 나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색을 칠하는 방법은 정말 다양하다. 붓을 사용할 수도 있고 나이프, 손가락도 훌륭한 도구가 된다. 물감을 얻는 것만이 채색의 과정이 아니다. 적당히 물감이 말랐을 때 물티슈나 헝겊으로 닦아 내면 색다른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누군가 가르쳐줄 수 없다. 다양한 방법이 주는 효과를 느끼고 스스로 색을 창조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날 화실에 있는 붓 통에서 원통형의 긴 막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재미 삼아 막대로 물감을 찍어 종이에 바르기 시작했다. 어떤 부분은 긁어 내고 여러 가지 색깔을 물감을 종이에 올린 후 쓱 훑고 지나가기도 하면서 모양을 만들었다. 물론 밑그림은 없다. 단지 장난 삼아 칠한 물감의 흔적에서 영감을 얻어가며 진행해 갔다. 놀이처럼 채색의 즐거운을 느꼈던 그림들이다.

 

<바다 풍경>, Acrylic on paper,  2016.8.6.
<무>, Acrylic on paper, 2016.8 20.
매거진의 이전글 미술과 창조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