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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Oct 27. 2022

15시간 동안 차 타고 여행이라니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여행지-그랜드캐년

"인생의 위기다"


생각이 입 밖으로 그대로 튀어나왔다. 생전 멀미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멀미 증상을 앓아 보니, 이건 보통일이 아니었다. 구역질이 날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토는 나오지 않는. 임산부 때 느꼈던 울렁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의 미식거림. 인생의 위기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당시 난 유타주의 '인앤아웃' 야외 테이블 앞에 앉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고, 그런 나를 60대 엄마와 아빠가 애처롭게 쳐다 보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우리도 멀쩡한데, 너가 왜 이러니."


그러게 말입니다요. 스스로도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간절하게 바랐다. 그랜드캐년 여행이 내게 남긴 건 지독한 멀미였다.




BBC가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여행지 1위에 오른 '그랜드캐년'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자연의 웅장함과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LA에 10년 동안 살았으면서 그랜드 캐년을 여태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늘 마음 한구석의 짐처럼 무겁게 데롱데롱 거렸다. 게다가 수년 전 엄마와 아빠를 데리고 그랜드 캐년을 가겠다고 큰 소리를 쳐놓고, 여권을 챙기지 않아 하루 전날 부랴부랴 여행 일정을 취소했던 기억이 아직 죄책감으로 남아있던 터였다.


오랜 죄책감을 떨쳐내기 위해 이번 환갑여행의 하이라이트는 '그랜드 캐년'으로 계획했다. 한국을 다녀오느라 휴가도 없는 처지이지만, 주말을 이용해 야심차게 다녀오리라는 욕심을 냈다.


그런데 말이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이곳은 죽다 살아날 기세로 힘을 끌어 모아서 가야할 곳이기도 했다. 


그랜드 캐년을 향하는 일정은 기가 막히게 빡빡했다.


새벽 2시 : 호텔 로비 집합

밤 10시 : 호텔 귀가

 

새벽 2시에 호텔을 나서서 밤 10시에 돌아오는 여정. 나도 나지만 60대의 엄마와 아빠가 견딜 수 있는 여정인지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휴가를 내지 않고 금토일 2박 3일로 라스베가스 여행을 온 처지라 당일(토요일) 캐년 투어만이 유일한 옵션이었다. 금요일은 라스베가스까지 차를 타고 4시간이나 가야했고, 일요일은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었으니 없는 날이나 마찬가지였다.


'줌줌투어' 사이트를 통해 당일에 그랜드캐년, 엔텔로프캐년, 홀스슈밴드, 파웰호수 등을 하루 만에 돌아보는 여행 일정을 골랐다. 1인당 169달러인 이 여행은 가이드님이 직접 운전하는 밴을 타고 다른 여행객들과 함께 한 조가 되어 당일 투어를 떠나게 된다. 라스베가스가 있는 네바다주에서 유타주를 거쳐 애리조나주를 찍었다가 다시 네바다주로 돌아오는 당일 코스. 최소 차에서만 15시간 이상을 보내야 하는 극강의 여행 코스다.


그랜드 캐년을 향하는 전날 밤. 일찍이 호텔로 들어와 샤워를 하고 잘 준비를 마친 후, 불을 껐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라스베가스의 야경은 언제봐도 비현실적으로 화려했다. 이 야경 앞에서 난 언제나 지는 사람이 된다. 두 발 두 손 다 들고 화려함에 넋을 놓고 만다. 라스베가스는 낮보다 밤이 아름다운 곳. 그래서 라스베가스의 밤은 늘 분주하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야경을 감상할 시간이 넉넉치 않았다. 야경을 뒤로 하고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새벽 1시에 모닝콜은 울릴 것이다. 지금 잠들면 4시간을 잘 수 있겠지만, 평소 잠드는 시간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들 수 있으려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 고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고 얼마나 지났을까. 나도 쓱 잠이 들었다.


새벽 1시50분. 호텔 로비를 향하는 길이 사뭇 상쾌했다. 엄마와 아빠는 비록 3-4시간에 불과하지만 푹 잠을 잔 눈치였다. 특히 불면증이 있는 엄마는 원래 새벽 1시면 잠이 깨곤 한다. 지난 밤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4시간을 알차게 잔 덕분인지 엄마는 개운함을 느꼈다. 우리 중 잠이 가장 부족한 건 나인 것 같았다. 호텔 로비는 새벽시간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새벽 2시 10분쯤, 호텔 앞으로 밴 차량 한 대가 섰다. 여행사 차량이었다. 우리가 가장 마지막 탑승자였는데, 아빠는 최고령 여행자인 만큼 조수석을 사수할 수 있었다. 나와 엄마는 선택의 여지 없이 밴 차량 3열에 위치한 맨 뒷자리에 앉았다.




엄마의 이야기


친구들과 여행 관련 주제를 놓고 수다를 떨다가 문득 '그랜드캐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엄마는 어김없이 2014년 여름을 떠올리며 표정이 구겨졌다. 아, 나는 이미 그곳을 다녀왔어야 했는데...! 


딸의 졸업식 방문 차 남편과 미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기대했던 여행지는 다름 아닌 그랜드 캐년이었다. 워낙 유명한 곳이기도 했고, 전화기 너머 딸의 설명이 아주 그럴싸했다. "엄마, 헬리콥터를 타고 신이 만든 가장 위대한 대자연을 경험하러 가는거야! 어때! 말만 들어도 끝내주지?!"


하지만 당시 딸이 여권을 챙기지 않은 채 여행을 나선 바람에 헬리콥터를 탈 수 없었고, 그랜드 캐년 여행은 급작스럽게 무산됐다. 그깟 여행지 안 가면 그만이지, 라고 딸 앞에서 큰 소리 치기는 했지만, 사실은 그랜드 캐년 여행지에 미련이 꽤나 컸다.


그런데 이번 환갑 기념 차 딸아이가 또다시 그랜드 캐년 여행 계획을 읊어댔다. 숨이 턱 막히는 일정이었지만 가겠노라 답했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다시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yes'를 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새삼스러운 점은 여러 경험들이 언제 또 올지 모르는 '마지막' 기회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생은 짧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느끼는 나이여서 그런 것 같다.


그랜드캐년 여행 당일, 호텔 로비에서 여행사 버스를 기다리는데 엄마는 피곤보다 설렘이 앞섰다. 본래 이 시간에 깨어있다면, 대개 불면증 때문이었다. 아, 어서 잠들어야 하는데 이 긴 밤을 어쩌면 좋나. 새벽 2시에 눈을 뜨면 숨 막힐 듯한 막막함만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2시에 떠나는 여행은 엄마에게 불면증의 좋은점을 처음으로 상기시켰는지 모른다. 때때로 엄마에게 새벽 2시는 대낮같은 시간이었다.


맨 뒷자리에 딸과 나란히 앉아 오늘 함께 여행을 떠날 젊은이들의 뒷통수를 바라본다. 대개 20대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어떤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까. 젊은 나이에 그랜드 캐년을 경험할 수 있는 그들을 엄마는 복받은 젊은이들이라고 생각했다. 생에서 좋은 걸 일찍이 누릴 수 있다면 그들의 남은 인생이 사골국물처럼 진하지 않을까 싶었다.


파웰호수-엔텔로프캐년-홀스슈밴드-그랜드 캐년으로 줄줄이 이어지는 여행에서 엄마는 단연 '엔텔로프캐년'과 '그랜드 캐년'을 최고의 여행지로 꼽았다.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오로지 인디언 가이드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엔텔로프캐년은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땅 밑의 세계를 보여줬다. 땅 밑에 이런 꼬불꼬불한 협곡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사진으로 본 적은 있었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바위의 질감이며, 곱디 고운 모래들이 살아있는 생명처럼 느껴졌다. 1931년 12살 된 인디언 소녀가 사슴을 쫓아가다 우연히 발견한 장소라는 이곳은 엄마의 인생에서 경험한 곳 중 가장 신비로운 장소다.

오래도록 꿈꿔오던 그랜드 캐년에 도착해서 엄마와 아빠는 '와' 탄성을 질렀다. 탄성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대절경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랜드 캐년에서 사진을 찍다 낭떠러지로 떨어졌다는 기사를 숱하게 접한지라 아빠는 엄마와 나를 절벽 가까이도 가지 못하게 했다. 엄마는 자신의 남편이 가진 고소공포증을 익히 알고있었다. 이 정도 쯤은 더 가도 좋을 것 같은데...싶었지만 엄마는 이내 아빠의 말을 따라준다. 엄마가 아빠를 배려하는 건 오랜 기간 쌓여온 협곡과 같은 모습의 견고한 습관이었다.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서 딸아이의 멀미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엄마는 이 여행이 얼른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젊은 딸아이가 몸을 아끼지 않고, 쉬는 날을 탈탈 털어 여행을 오더니 탈이 난 모양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이 정도 여행이면 충분하다고, 더이상의 여행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딸아이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차에서만 15시간을 보낸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여행을 마치고 호텔 침대 위에 눕자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엄마는 휴대폰을 충전하며 그날 찍은 사진들을 둘러본다. 그림 속에 나와 남편과 딸아이가 있구나.  사진들은 CG 아니라 현실이다. 엄마와 아빠는 나란히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그랜드 캐년에서 찍은 사진으로 바꾸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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