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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Oct 12. 2022

가족사진을 찍었다


삼십대 중반에 접어들자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부쩍 커졌다. 주변 사람들의 부고 소식을 들으며, 인생의 유한함을 정면으로까지는 아니어도, 비스듬히 옆에서 지켜보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리고 두려워졌다. 나 또한 언젠가는 소중한 이들의 상실을 겪어야 할테니. 두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일 뿐이라는 걸 되새겼다.


그래서 엄마의 환갑생일을 앞두고 가장 먼저 세운 계획은 가족사진 찍기였다. 가장 행복한 어느 한 순간을 영원히 박제해두고 싶었다.


온 가족이 함께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은 첫째 아들 돌잔치 때다. 둘째 아들의 돌 때는 팬데믹이 한창이라 한국에 방문할 수 없었다. 반년 전부터 한국에서의 돌잔치를 계획해뒀으나, 팬데믹 동안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 계획했던 일들은 송두리째 날아갔다. 팬데믹은 2년 넘게 지속됐고, 그로 인해 아주 오랜만에 상봉한 우리 가족을 두고두고 추억할 사진을 엄마 환갑을 기념해 꼭 찍고 싶었다.


몇 년 전 크리스마스 기념 가족사진을 찍어줬던 작가님께 몇달 전부터 연락해 엄마 생일 당일에 사진촬영을 예약해뒀다. LA에는 한국 특유의 스냅 감성이 담긴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분이 몇 명 활동하고 계시고, 이분들의 인기는 실로 놀랍다. 작가분들은 특히 웨딩스냅에 초점을 맞춘 작업을 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웨딩촬영 특성상 몇달 전부터 사전스케줄이 꽉 차있다. 고로 LA에서 가족사진을 찍기 원한다면 사전 예약을 빨리 끝내두는 게 관건이다.


메이크업도 마찬가지다. 2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진한 화장이 아닌 자연스러운 화장을 추구한다면 LA에서 메이크업을 받을 곳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SNS를 통해 LA 메이크업 관련 사진을 찾아본 후 재빨리 예약을 해야한다. 메이크업 또한 지난 번에 이용했던 곳을 택했다. 당일 메이크업을 받는 것은 엄마와 나 단 둘뿐. 남자들은 선크림만 바르면 되지 뭐. 사진작가, 메이크업까지 예약을 마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제 사진 촬영 당일까지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 됐다.




엄마의 이야기


엄마는 이따금씩 딸이 미국에서 살고있다는 사실에 화가 올라올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특히 명절 때면 딸의 부재가 크게 느껴진다고 했다. 막내아들은 자신의 인생 살기에 바빠 명절에도 당일에만 얼굴을 쓱 비치기 일쑤고, 엄마는 명절 당일 전날에는 홀로 부엌을 지키며 명절 음식을 준비하곤 한다. TV 앞 소파에 앉아있는 아빠는 "도울 게 있으면 말해줘"라고 당부했지만, 아빠가 명절 음식 준비에 도울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아빠는 전형적으로 사회생활에만 치중되어 있는 남성으로 집안일에는 영 서툴다. 엄마는 북적북적 하던 과거의 명절 풍경을 기억하며, 미국에 있는 손주들이 보고싶어진다. 나도 손주가 두 명이나 있는데, 왜 외로운 명절을 맞이해야 하나. 딸이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고 엄마는 이따금씩, 꾸준히 생각한다고 한다.


엄마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거실 복도에 걸려있는 가족 사진을 마주한다. 이걸 찍은 게 언제였던가. 10년 전 찍어둔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은 싱그럽게 여겨진다. 사진을 찍을 당시는 50세였는데, 사회적으로 '젊음'의 카테고리에 포함되기는 힘든 나이다. 하지만 60세의 엄마는 50세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젊어 보여 낯설다. 요즘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도 낯설기는 매한가지다. 언제 이렇게 나이들어 버렸지. 눈가의 주름을 정면으로 확인사살 당할 자신이 없어 선글라스 없이 사진 찍는 일은 선뜻 내키지는 않는다. 딸은 환갑을 맞이해서 LA에서 가족사진을 찍자는데,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올 수 있을지 우려가 된다.


엄마는 딸에게 전화를 건다. "옷을 뭐 입을지도 모르겠고, 과연 사진이 잘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푸념의 말을 건네보지만 딸은 한치의 흔들림이 없다. "옷은 미국에 와서 같이 사면 되고, 사진이 잘 나오든 잘 나오지 않든 다 추억이지 뭐. 환갑에 찍은 사진이라는 게 의미가 있잖아 엄마."


한 번 하기로 마음 먹은 건 어떻게든 하고야 마는 딸과의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걸 아는 엄마는 이내 하려던 말을 거둔다. 그리고 가족사진의 장점에 대해 떠올린다. 손주들과 함께 찍는 가족사진은 처음이니까 의미가 남 다를거야. 게다가 올해는 내 환갑이기도 하니까 의미가 남다르지. 아들까지 미국에 온다고 하니, 온 가족이 모일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다.


그렇게 생각하자 은근슬쩍 가족사진에 대한 기대감이 올라왔다. 사진이 어떻게 나올까.



 

가족사진을 찍는 당일. 엄마와 나는 얄밉지만 얌채 행동을 하기로 했다. 두 아이를 남자 세 명(아빠, 남편, 남동생)에게 맡겨두고, 우리 둘은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것이다. 과연 남자 셋이서 두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잘 입혀서 제 시각에 사진관에 나타날 수 있을지 심히 우려가 됐지만, 그래도 사진 찍기에 앞서 우리 두의 메이크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가려던 메이크업샵의 당일 웨딩 메이크업 예약이 많았던 관계로 우리는 무려 오전 7시까지 샵으로 가야했다. 엄마와 나는 6시15분쯤 집을 나섰다. 아직은 어둑했던 하늘과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찼던 새벽 공기. 엄마와 나는 평소 쉽사리 접하지 못했던 새벽 분위기에 취해 살짝은 설레는 감정이 올라왔다. 가족들을 남겨두고 우리 둘이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와 단 둘이 여행을 가본지가 언제던가. 둘째를 임신하고 7개월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엄마는 한국의 설날 연휴를 맞아 미국을 방문했었다. 당시 회사를 다니고 있던 나는 엄마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나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휩싸여 주말을 이용해 1박2일로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임산부 주제에 너무 큰 욕심을 부린 것 같지만, 그럼에도 후회는 없다. 엄마와 나는 1박2일이 마치 3박4일처럼 여겨질 정도로 알찬 시간을 보냈다.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 두 모녀는 결혼 전 기회만 생기면 여행을 다녔다. 홍콩과 일본은 우리가 가장 자주 방문했던 외국. 할머니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집을 오래 비워둘 순 없었다. 고작 3박4일이 우리가 집을 비울 수 있는 가장 긴 시간이었다. 엄마는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집에 도착해 할머니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며느리가 '여행'을 명목으로 집을 비우는 게 썩 좋을리 없었던 몸이 아픈 할머니.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그토록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유럽여행 한 번을 다녀오지 못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결혼을 했다. 그리고 4개월 만에 벌컥 임신을 해버렸으니, 결혼 이후 엄마와 나의 여행 이야기는 종적을 감췄다.


그래서 메이크업을 하러 가는 길 더욱 설레지 않았나 싶다. 둘만의 시간은 실로 오랜만이었으니까. 엄마와 아빠는 대부분 한 세트로 미국에 방문하시기 때문에 모녀만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내가 한국에 방문할 때는 언제나 아들 둘이 내 옆에 찰싹 붙어있으므로, 한국에서는 더더욱 엄마와 둘이 있을 수 없다. 엄마는 우리 아이들을 봐주기 바쁘고, 난 밖으로 나가기 바쁘니.

메이크업을 마치고 촬영 시간까지 시간이 2시간 반 정도 비었다. 그로브몰에 위치한 '파머스 마켓'에 갔다. 엄마가 좋아하는 과일 컵을 사서 아침을 대신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텅 빈 야외 쇼핑몰을 돌아다녔다. 쇼핑몰에는 우리 둘 뿐인 듯 했는데, 그래서 꼭 쇼핑몰 전체를 대관한 기분 마저 들었다. 메이크업한 우리 모습이 마음에 들어 사진도 잔뜩 찍었다. 이게 여행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모녀에게 주어진 몇 시간의 LA 여행이나 다름없었다.


사진관에서 우리집 남자 다섯명과 만났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들 둘은 왁스까지 바른 멋진 모습으로 '엄마~'하며 내게 달려와 안겼다. 아이들과 함께 찍는 가족사진이었기에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45분 만에 가족사진 촬영이 끝났다. 산만한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아이들에게만 온 신경이 맞춰진 채로 촬영을 진행되다 보니 아무래도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과연 만족할 만한 가족사진이 나올 수 있을까?


그래도 뭐, 다함께 사진을 찍은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만족한다. 우리는 아빠의 칠순을 기념하며 4년 후에 또다시 가족사진을 찍기로 약속했다. 4년 후 우리 가족들의 모습이 기대가 된다. 그때쯤이면 남동생은 결혼을 했을까? 엄마, 아빠에게는 또다른 손주가 등장할까. 궁금한 게 많다.

가족사진을 바라보며, 엄마와 아빠가 한 평생 뿌린 씨앗의 결과를 마주한다. 내가 부모님의 씨앗이라고 생각하니 그에 따른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들의 삶에 의미를 더해줄 만한 훌륭한 자식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서 그런 것이겠지. 그래도 이런 부담감이 싫지만은 않다. 열심히 살아갈 힘을 주는 가족이 있기에 힘든 시기에도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는 것 같다. 이번에 찍은 가족사진을 부적처럼 내 마음에 품고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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