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씩 육아를 하는 친구들이 "아이들이 자라는 게 너무 아쉬워!"하며 울상을 지을 때면 내 머리 위로 엄청난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쉽다니? 아쉽다니?! 아쉽다니?!!!!
내게 육아란 대체 언제쯤 끝이 나나, 하고 수시로 손가락을 세어가며 아이들이 대학가는 날만 목 빠지게 기다리게 하는 일로 일종의 장기 형벌이었다. 이십대 중반에 출산을 한 나는 본래 꿈꾸던 삶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커리어우먼이 되어 내가 직접 번 월급으로 멋지게 살아보겠다는 어린 시절의 반짝이던 꿈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서야 일을 시작한 까닭에 내가 번 월급은 고스란히 생활비가 되었다. 퇴근 후 자기계발은 커녕 정신없이 아이들을 차례로 픽업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차려 먹인 후, 애들 숙제를 봐주고, 씻기고 재우고 나면 밤 10시가 된다. 억울한 마음에 영상 몇 편 보다 잠들면 다시 또다른 아침이 찾아오고, 삶은 어제와 다를바없이 이어진다. 일과 육아로만 점철된 삶을 반복하다 보면 산다는게 뭘까? 자꾸만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졌다.
그랬기에 아이들을 키우며 아쉽다는 말을 하는 부모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솔직한 심정으로 아이들이 하루하루 커가는 게 내겐 가장 큰 희망이자 기쁨이었으므로 아쉽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이 크는게 아쉽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도 아니고 꽤 많이, 자주. 할 수만 있다면 시계태엽이 조금은 느리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작하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까지는 전-혀 해보지 못했던 이런 아쉬운 감정이 드는 걸 보면 육아가 꽤나 편해지기는 한 모양이다.
아이들은 각각 만 나이 7세, 5세로 최근 막내까지 학교에 '킨더'로 입학하면서 미국 정규교육을 받고 있다. 막내까지 유치원을 졸업하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 뭔가 나도 유아기 육아로부터 졸업을 한 느낌이 들었다.
최근 통화를 했던 한 친구도 "이제 너가 많이 편해보인다"는 말을 해줬었다. 친구는 한국에 살기 때문에 나와 일상을 시시콜콜 나누진 못하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주로 나와 내 가족들의 소식을 접한다. 친구는 소셜미디어 속 사진만 봐도 너가 육아를 즐기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다. 난 이제 더이상 육아가 힘들다고 징징대는 엄마가 아니었다. 두 아이 모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면서 육아 강도는 현저하게 낮아졌다.
이제 아이들은 밥을 차려주면 식탁에 앉아 스스로 식사를 끝내고, 씻고 오라고 하면 둘이서 샤워를 마치고 온다. 독서, 숙제 등을 먼저 끝내고 TV 시간이 주어지는 규칙도 잘 지킨다. 아들들이라 수시로 싸우긴 하지만, 칭찬스티커가 '마이너스' 된다고 협박하면 금세 다툼을 멈추고 한 번만 봐달라고 조른다.
아이들은 이제 내게 삶의 짐이라기 보단 삶의 희망에 가깝다. 이 아이들이 있어서 여전히 제약받는 일은 많지만, 그것보다도 아이들 덕분에 얻는 행복이 더 많다고 느껴지니 이쯤되면 어느 정도 고된 육아로부터는 해방된 게 맞는 것 같다.
조금만 더 크면 엄마, 아빠와 노는 일 보다는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재밌어지겠지? 가족 여행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을테고. 그런 날들이 부디 먼 미래여야 할텐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이들의 이 예쁜 시기를 매일 두 눈과 마음에 담고, 사진과 영상으로 남겨 본다. 영원히 박제하고 싶은 감사한 순간들. 사진 속 아이들만 봐도 웃음이 새어나오니, 이런게 사랑이 아니면 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