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 Sep 16. 2018

나는 가방애자다

떠나보내야만 하는 서글픔에 대해 


에코백 10여개, 백팩 4개, 노트북 파우치와 클러치 10여개, 미니백 대여섯 개, 숄더백 대략 20여개. 참, 가죽공예로 ‘한 땀 한 땀’ 만든 백도 꽤 된다. 그 많은 가방을 다 메느냐고? 그럴 리가. 태그도 떼지 않은 채 개시만 기다리고 있는 개체들이 꽤 된다. 어차피 데일리로 메는 꼭 필요한 가방은 노트북 휴대용 백팩과 파우치, 온갖 물건을 쓸어 담는 빅백과 보조가방 용도로 쓰는 천가방뿐. 가방이 장식장 하나를 꽉 채우고 넘치니 구석 치에서 먼지만 쌓이는 백은 ‘잉여’ 그 자체, 없는 것과 다름없다. 




상황의 시초를 생각하노라니, 세상에 하나뿐인 소비를 위해 지갑을 열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 전까지 패브릭이나 인조가죽으로 된 백만 메던, ‘개념녀’이자 가죽을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일을 견디지 못하던 에코주의자였다. 가방을 사도 빈티지 숍을 이용하고 백화점이나 면세점에는 얼씬하는 일이 없었다. 이십대 중반까지는 돈이 없어서 못 샀고, 짧은 직장생활을 그만둔 후로 줄곧 프리랜서와 시민단체 활동가로 살아왔으니 가죽을 소비할 일이 없었다. 덩어리 고기를 먹지 않는 정도의 (아주 소극적인) 채식도 했었다. 그만큼 나의 멋과 소비를 위해 다른 존재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하나뿐’인 가방이 날 바꿨다. 직업상 잡지도 많이 봤지만 기성품 백에서는 느끼지 못한 매력을, 가죽공예 작업실에서 만난 것이다. 한 눈에 반한 그 가방을, 다른 디자인으로 두 개나 사버렸고 가죽이 주는 그 질감과 낡음조차 멋드러진 변화가 좋았다. 비 오는 날 못 든다는 것과 인조에 비해 무겁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가죽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한 문제의 그 가방. 노트북이 들어가는 넉넉한 사이즈에 정장은 물론 캐주얼에도 잘 어울려 한때 잘 들고다녔다. 
동글동글 각진 디자인해 반해버렸지만 지금은 떠나보낸 가방.


그리고 시간이 지나 가죽공예를 배우면서 가죽제품 생산을 위해 죽임을 당하는 소보다 고기 소비가 더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즉 사람이 먹기 위해 죽인 부산물을 활용해 가방이나 소품을 만들게 된 것이다. 채식주의자에게 왜 가죽제품을 쓰냐고 묻는 사람이 있지만 벨트나 신발, 자동차의 카시트 등 가죽을 아예 소비하지 않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가죽은 소비하지만, 나름의 원칙은 있다. 태어나지도 않은 송아지에게서 벗긴 송치가죽이나 고기도 먹지 않는 여우를 죽여 만드는 모피는 분명 반대다(가죽공예 선생은 파충류 가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가죽이 지닌 물성, 가공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차이가 좋다. 그리고 태생적으로 코팅이나 화학염료로 가공하는 크롬 가죽보다는 식물에서 추출한 탄닌염료를 쓰는 베지터블 가죽을 선호한다. 좋은 가죽에 단순한 색감과 디자인의 가방은 유행과 무관하게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다.   


가죽 그 자체의 매력, 손바느질이나 미싱으로 하나씩 만든 제품(둘 다 핸드메이드로 분류)을 선호하면서부터 결국 내셔널 브랜드(국내 회사가 대개 중국에서 만든)의 가방들은 장롱 신세가 되어버렸다. 중고 시장에 내다팔려고 해도, 유행이나 색감 등 취향을 강하게 타는 것들이라 그다지 팔리지가 않는다. 힘들여 플리마켓에 나가도 가죽가방은 아주 싼, 낡은 중고가 아니면 안 팔린다. 새 제품을 반값에 팔자니 산 가격이 아깝고, 언젠가는 들 수도 있겠지 하면서 모셔놓은 가방들이 나의 죄책과 가난을 부추기고 있으니 정말 답 없음이다! 


미국의 한 백화점에서. 다소 투박한 취향의 백에서부터, 미니멀한 백까지 다양한 가방을 구경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가죽가방 하나만 사도 행복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물건을 보는 안목이 생기면서 더 값비싸고 희소한 제품이 사고 싶어졌다. 결국 끝을 모르는 이 소유욕은 장인이 만든 명품을 소유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 스스로 의심하게 됐다. 장롱에 쌓아둔 가방을 제쳐두고 인터넷 공간에서 기백만 원에 오고가는 가방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지금껏 헛산 걸까 하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름대로 열심히, 의미 있게 살았지만 기껏 돌아오는 건 소유물과 그 처치에 허덕거리는 삶이라니! 게다가 진짜 명품은 살 수도 소유할 수도 없다니!! 이게 비극이 아니면 무엇일까. 


결국 이 모든 것은 협소한 자존심, 아니 자존감의 문제였다. 돈이 안 되는 예술과 사회운동을 동시에 영위하느라 빠듯한 삶을 당당하게, 내 방식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실은 남만큼 잘 살고 싶고, 과시용 명품 하나는 갖고 싶은 이율배반의 삶. 내가 이루었고 이루고자 노력한 것이 남에게 보이지 않는 가치라는 이유로 좌절하고 싶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성공’으로 인정받는 삶의 기준을 바꾸고 싶어도 내 힘으로 안 되는 일이니 자주 무력감에 빠졌나보다. 그래서 돈이 들어올 틈만 생기면 다시 구매자로 돌아가 ‘고객님’ 소리를 듣기 위해 애썼다. 공정무역 상품이나 후원바자 물품 등 의미 있는 소비조차 이를 합리화하는 방법에 불과했다. 


결국 욕망의 크기는 더 크고 무거운 ‘가방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모든 걸 팔아도 샤넬이나 에르메스를 살 수 없다. 양보다 질이라는 명제를 떠나 결국 이 모든 것은 선택이다. 허리를 졸라 적금을 부어서 그 돈으로 진짜 갖고 싶었던 물건을 소유할 것인가, 그때그때의 ‘소확행’을 추구하며 의지박약한 인간이 될 것인가. 후자의 예시인 나는 이제 그 삶의 종말에 직면한 것 같다. 애써 무시하려 해도 묵혀둔 가방들이 보내는 무언의 압박은 임계를 넘어섰다.       

매거진의 이전글 잡동사니증후군을 아시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