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 Jan 29. 2019

감정을 수치스러워 하지 않는 법

끝도 시작도 결국은 과정일 뿐 

아시나요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댈 보면 자꾸 눈물이 나서 

차마 그대 바라보지 못하고 

외면해야 했던 나였음을 

아시나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스물 둘이었나, 짧디 짧은 첫사랑이 삼각이었고 여전히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내게 도착한 음성메지시가 이 노래 '아시나요'였다.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 시골집 처마에서 이 노래를 듣는데, 마음에 지진이라도 난 듯 용솟음치던 순간이 지금도 선하다. 이 노래를 보낸 친구는 널 좋아해, 혹은 사랑했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다. 사랑에 버거워하던 내 주변을 맴돌며 힘들게 번 돈으로 밥을 사주고, 넌지시 우리 미래를 어필하던 착해빠진 친구였다. 


시간이 지나 휴학생이던 난 학교로 돌아가고 집이 가난해 대학도 가지 못했던 친구는 해군 하사관으로 입대를 했다. 물리적으로 멀어진 것보다 우리 사이의 괴리가 생겨났다. 군대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을 그 애가 마지막으로 힘겹게 걸어온 전화를 잘 받아주지 못했다. 동아리 친구들과 엠티 가던 길이었고 시끌벅적한 차 안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머뭇거리던 친구가 하고 싶었던 말이 “죽고 싶어”인지 “널 정말 좋아해”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고, 이듬해 나는 그 친구가 자살인지 의문사인지로 짧은 생을 맺었다는 사실을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미 도착했을지 모를 친구의 마음을 미처 몰랐다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그 친구가 선망하던 학교의) 학생이란 처지를 뻐겼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마지막 전화마저 애써 받아주지 못한 죄책 때문에 나는 몸부림쳤다.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어떤 만회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미치게 원망스러웠다. 


망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더 잘 망하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법이다.



감정이 수치스럽고 버거운 이유 


언젠가부터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수치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감정은 늘 내게 거추장스러운 무엇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꼭 다치는 결말이 주어졌으니까. 혹은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걸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도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저 사람과 엮이지 않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몸과 마음에 빗장을 걸고 누구와도 친밀한 언어를 나누지 않았다. 


몸에 사리가 쌓이듯 마음에도 사리가 쌓이는지, 나는 서른이 거의 되어서 뒤늦게 시작한 연애에서 늘 최선을 다해서 쌓인 앙금들을 털어내려 노력했다. 마음을 아낌없이 표현했고, 미처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까봐 먼저 알아봐주려고 애를 썼다. 나보다 두 배를 버는 사람과 만나도 늘 기꺼이 광역버스를 타고 그곳에 가서, 밥값도 꼬박꼬박 나눠서 냈다. 혹시나 지쳐서 나가떨어지게 만들까봐, 애인을 고문하는 건 아닐까 늘 자신을 몰아세우던 ‘희대의 개념녀’였다고나 할까. 스킨십도 내가 원할 때가 아닌 상대가 원할 때 하려고 노력했다. 정신을 차리게 된 건, 애인이 자신의 동료들과 사는 숙소에 와서 청소와 빨래를 해달라고 요청한 무렵이었다. 


적어도 최선을 다한 후에 상대가 시들해지면, 굳이 누가 이별을 고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는 나의 소중함을 몰라줬고, 나도 할 만큼 하고도 돌아오는 게 무수리 취급이면 도무지 흥(?)이 안 났으니까. 그렇게 짧게 불태운 연애를 몇 번을 하면 연애고 뭐고 시들해지곤 했다. 심지어 내가 한 것이 연애인지 보시인지도 헛갈렸다. 보다 못한 사람들이 좀 진중해지라고, 그렇게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직진하는 게 아니야, 라고 하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난 페미니스트라서 원래 그렇다고 응수하는 못난이였으니 말 다했다. 



드라마퀸 수집도 이젠 질렸어 


그렇게 안 된 결말에 익숙해지는 사이, 새로운 연애의 패턴이 생겼다. 어차피 헤어질 거니까 서로 볼장 안 볼장 얼른 보자는 식의 시나리오였다. 평범한 연애로는 도무지 감흥이 없는지 막장 연애만 하는 ‘드마라퀸’도 꽤 만났다. 유서를 써놓고 나보고 보라고 프린트해 놓는 사람은 정말 죽지 말라고 (인류애적인 감정으로) 만났는데 자기 집안일을 안 한다고 주먹으로 때리기에 끝냈고, 서로 마음이 너덜거릴 때까지 만난 엑스와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애인은 모든 것이 들통 나자 잠수를 타서 결국 헤어졌으며, 헤어지고 나서 커뮤니티에서 공개 저격을 당한 적도 있었다. 


녹슬고 고장난 마음이라도 잘 매만져서, 내가 할 수 있는 더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 누구도 아닌 날 위해서. 


최근에 만났던 친구는, 창피해서 긴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애인이 있었고 어쨌든 그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걔가 젤 싫어하는 관계의 패턴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래도 니가 날 만나는지 보자, 수준이었다. 멘붕의 바닥에 뒹굴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요즘 춤을 추면서 다진 근력과 깡 덕분이었다. 우울증과 분노를 오가는 와중에 조금씩이나마 일을 해나갔고, 매일 스쿼트와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를 했다. 더 좋은 댄서가 되고 더 나은 사람을 만나려면 결국 체력이 좋아지듯이 마음의 근육이 생겨야 한다. 아직도 그 방법은 잘 모르겠다. 마음에 내성이 생겨서 관계 앞에서 불안해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에 집중할 수 있는 법 말이다. 저번에 쓴 글에서는 끝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했지만 그건 의지의 표명이었고 실은 아직 많이 무섭고 두렵다. 나는 늘 끝을 향해, 좋지 않은 결말로 나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좋은 결말은 곧 결혼’이라는 뻔한 시나리오는 더더욱 원치 않는다. 


곧 구정이 다가온다. 이미 먹을만치 먹었는데 한 살 더 먹기 전에 엄마는 더 좋은 ‘총각’을 만나라고 성화다. 이번엔 안 내려갈 핑계도 없다. 차라리 돈이라도 열심히 벌어놔서 해외여행을 갔더라면 좋았겠지. 사춘기도 지난 지 오랜데 아무래도 반항의 표시로 샛노란 탈색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참한 여성의 이미지라도 망가뜨려야지 원. 도무지 결말을 어찌 맺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망할 때 망해도 서로 ‘좋은 연애’였다고 추억할 수 있는 만남을 하고 싶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면 마음의 근육을 더 키워야지. 적어도 이번에 했던 치명적인 실수는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는 망한 관계에 안주하지 않고 옛 기억에 더는 사로잡히지 않는 것을, 일찍이 삶을 내려놓은 내 친구가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것이 너와의 추억을 헛되이 하지 않는 일이라 믿을게. 

작가의 이전글 화단's 스트리트 라이프 들어볼테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