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댄서라는 로망을 그리며
20대 후반에 커플 춤이라는 신세계를 처음 접하면서, 함께 추던 이들과 소셜 댄서로 나이 들자는 기약없는 약속을 했었더랬다. 하지만 누구는 관절에 무리가 가는 잘못된 자세로 인해 허리 병이 생겼고, 연애가 끝난 후 한쪽이 기별 없이 가버리는가 하면, 결혼과 임신이라는 2연타를 맞으면 어느새 많은 이들이 없어지곤 했다. 일찍 결혼해 다 자란 자녀를 둔 소셜 댄서는 간혹 있지만 한창 자라는 시기에는 아무래도 춤추기가 어렵다. 친정이나 시가 외에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을 돕는 사회적 인프라가 전무에 가깝다 보니, 한국에서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기가 극한의 어려움인 것처럼.
가끔 야외에서 댄스 행사를 하면, 유모차를 끌고 나들이 겸 나오는 부부도 있다. 그들이라고 다시 춤추고픈 욕구가 없을까. 아내는 맞벌이건 전업이건 육아와 가사로 인해 지쳐있을테고, 남편은 늦게까지 일하고 혼자만 재미 보러 오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계속 춤을 추러 나오는 이들은 비혼 여/남, 아이가 없는 딩크족뿐이다. 아주 예외적으로 스윙 빠에 아이돌봄 방을 돈 들여 설치한 사장 내외가 예외에 해당한다. 이런 곳이라면 아이를 데려와 부부가 번갈아 춤을 추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30대 말 40대 초가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돈 벌어 취미에 쏟아붓는(춤바람이 제대로 나면 시시때때로 해외 워크숍이나 대회에 참여하곤 하니) 삶을 반길 부모가 몇이나 될까. 우리 집이야 어차피 내세울 명예나 부가 없으니 상관없지만, 집안이 좋기로 소문난 이들은 절대 ‘댄밍아웃(Dan-ming out)하지 않은 채, 온라인 공간에 자신의 사진이나 동영상이 올라가는 것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놈의 사회적 위신과 체면이 다 뭐라고. 나는 벌건 대낮에 홍대 거리에서 밴드 음악에 맞춰 춤추다가 신발이 벗겨져서 휘이 날아간 후로 체신 따위는 버렸다. 그 사건은 두고두고 돌이키는 추억으로 남긴 했지만.
밤만 되면 반짝반짝 댄싱 라이프
서울에서 방 한 칸 구할 보증금도 없어 방황하던 20대를 지나니, 지방러(출신)에게도 나름 장점이 있었다. 퇴근 후나 마감 후에 내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집에선 알 도리가 없다는 것. 학창 시절 댄스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한 것이야 알고 있지만 설마 이런 춤을 추리라곤 상상조차 못하실 것이기에. 하라는 연애는 안 하고 남사스러운 춤을 추고 돌아다닌다니 이 무슨...!
춤을 춰서 떡이 나와 밥이 나와! ; 전업 댄서도 드물게 있어요.
연애나 좀 하던지! ; 춤만 추는 게 더 깔끔하고 좋은데
밤늦게 야한 옷 입고 돌아다니다 큰일 난다 ; 땀에 쩔은 티셔츠에 레깅스 입고 다녀요. 밤길은 범죄자들이 조심해야지!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 춤 출 체력 만드느라 운동하는데요.
뭐 이런 부질없는 문답을 상상해보기도 하지만, 일단 내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한 세대고 어버이연합 비슷한 또래와 어울리는 은퇴 성직자에게 이런 얘기가 씨알도 먹힐 리가 없어서 깔끔히 포기했다. 언젠가 이 칼럼을 엮어서 책을 내게 되면, 이거 보세요, 춤이 밥 좀 먹여주던데요, 항변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하지만 20대 이후 나를 아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내가 얼마나 춤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소통해왔는지 모르기 힘들 정도다. 말을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언어로 나를 표현하는 쪽이 아니어서, 춤추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야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여긴다. 어릴 때의 괄괄함이 왕따 시절과 나대는 여자를 꺾어놓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순화되었다면, 펄펄 기운차게 사위를 펼치는 내 모습은 타고난 성정대로 자유롭고 강인하기 때문이다. 평소의 나른함과 게으름, 시크함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곡조와 리듬을 내 것으로 만들며 만족스러운 한 곡을 채우고 나면 자존감이 한껏 높아지는 기분이다.
거울 속의 나, 파트너를 마주하는 일
“춤출 때 눈에서 레이저가 나와요.”
잠깐 트라이벌 벨리댄스(오리엔탈 벨리보다 더 힙합스럽고 강렬한 춤)를 배웠을 때 강사님이 한 말이다. 비록 웨스트코스트 스윙에 집중하느라 벨리 수업은 접었지만 그도 참 매력있는 춤이어서 언젠가는 다시 배울 것이다. 춤과 몸은 아주 정직해서, 내공을 차곡차곡 쟁여두는 만큼 움직임에서 태가 나온다. 누군가 춤을 배우러 왔는데 초보답지 않은 오라가 마구 뿜어져 나온다면 그는 필시 다른 춤이나 운동 경험이 많을 것이다.
이제는 사람을 보면 어떤 움직임이 나올지, 평소 생활습관이 어떤지, 왼발 혹은 오른발을 끌면서 걷는지까지도 보이곤 한다. 결국 댄서는 평소의 몸으로 자신이 추는 춤을 말할 수밖에 없다. 육감적인 리듬을 타는 라틴댄서들은 굴곡지고 탄탄한 하체를 갖고 있으며, 발레댄서는 길고 가늘고 곧은 체형을, 힙합댄서는 업다운의 그루브가 어깨에 숨어있다. 대부분 하체와 코어가 발달한 것이 공통점.
인터뷰집 <독립, 하셨습니까>를 내며 팝핀제이(전 블루웨일브라더스 멤버)를 인터뷰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일본의 춤 문화에 대한 일화였다. 유독 ‘덕후’가 많은 문화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클럽에 가면 직장인이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팝핀을 추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각자의 춤에 몰두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비록 우리의 부모들 세대에선 외간 남녀가 춤을 추며 어울리는 공간이 어두운 조명 일색이었다면, 우리가 나이 들어 밝은 조명에서 자연스럽게 춤을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널리 퍼져나갔으면 한다. 스윙 혹은 라틴클럽에서 10대부터 노년의 댄서까지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며, 대를 이어 소셜댄스 강사가 탄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주크를 비롯한 센슈얼 장르의 춤도 그 매력을 아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고, 지금 추는 춤에 대해 이렇게 계속 떠드는 사람이 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