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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님의 핸드릭스 진토닉

취향의 확장

by 메밀

우리가 흔히 양주라고 부르는 술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흔히 접하는 보드카, 샴페인, 위스키 외에도 진, 럼, 테킬라 등 정말 다양하다. 그중에서 칵테일로 많이 접해본 진(Gin)에 탄산수를 주재료로 한 진토닉(Gin and Tonic)은 바(Bar)의 메뉴판에서 한 번쯤 접해봤을 것이다. 나는 진토닉이 싫었다. 이름이 어딘가 낯익어서 딱히 아는 술이 없어 시켜 마셔보면 달지도 않고 새콤하지도 않은 것이 영 별로였다. 그렇게 진토닉 별로야, 하고 일 이년 후쯤 바에 가면 이전의 기억은 까맣게 잊은 채 다시 시켜서 마셔보곤, 웩.


오이가 들어간 진토닉이 있다고 한다. 첫 직장을 다닐 때 사수였던 대리님이 말하길 집에 ‘핸드릭스 진’을 두고 가끔씩 진토닉을 만들어 먹는다고. 그런데 거기에 탄산수 말고도 오이가 들어간단다. 나는 오이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삼겹살집에서 식전에 내어주는 생오이와 쌈장을 보면 쌍수 들고 환영한다. 그런데 진토닉과 오이의 조합이라니, 웩. 대리님은 예상한 반응이라며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이에 호불호가 있다 보니 대게 이런 반응이라고 한다. 그녀는 7월 초, 이사 시기에 맞춰 집들이 오면 핸드릭스 진토닉을 맛보게 해 주겠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맛일까? 굳이 돈 주고 사 먹고 싶진 않지만 무료로 맛만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가온 집들이에서는 위스키 두 종류만 번갈아 마시다가 술자리가 끝나버렸는데, 그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바에 가서 핸드릭스 진토닉을 시켜버리고 말았다.


세로로 얇게 저민 오이가 컵에 말려있다. 오이의 향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모두들 아는 그 신선한 향긋함이다. 술잔에 코를 가까이 대면 그 향이 컵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대학가에서 저렴하게 파는 진토닉보다 성수동에서 비싸게 파는 진토닉에 들어가는 탄산수의 종류가 다른 건지, 바텐더 스킬이 다른 건지 모르겠지만 꽤 맛있었다. 내 앞의 바텐더가 만들어주는 오이 없는 진토닉은 이전의 웩, 스러운 맛과는 다를 것 같다는 맹신도 생겼다. 옆에 앉은 친구가 긍정적인 나의 반응을 보더니 한 입만 마셔보겠다고 한다. “음…” 그녀는 외마디 말을 남기고 잔을 도로 돌려주었다. 그녀 또한 오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오나 술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별로라면서 “너무 술 같아.”라고 했다. “술이 술 같지 그럼 음료수 같겠니?” 핸드릭스 진토닉의 인생이 너무 고달프게 느껴졌다. 오이의 호불호를 이겨내고 진의 비율로 불호를 받다니. 또 한 명의 일행이 있었다면 앞의 두 단계를 이겨내고도 레몬즙의 비율에서 불호를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저기 치이는 핸드릭스 진토닉을 사랑하고 싶었다.


오이 못 먹는 사람, “쓴 맛을 감지하는 유전자 있어.”
사람의 7번 염색체에 ‘TAS2R38’이란 특정 유전자가 있다. 이 유전자는 쓴 맛에 민감한 PAV형과 둔감한 AVI형으로 나뉜다고 한다. 그렇다고 오이를 못 먹는 게 마냥 이 특정 유전자 탓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게, 개인이 향을 처리하는 유전자나 뇌의 경로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한다.


대리님의 ’ 핸드릭스 진토닉‘은 나의 ’ 핸드릭스 진토닉‘이 되었다. 가끔 바에서 칵테일을 마실 때면 무얼 주문할지 고민하는 지인에게 “오이가 들어간 진토닉 어때?” 추천하곤 했다. 어떤 지인은 PAV를 가졌구나, 하고 지나갈 때도 있었고 또 다른 지인은 굉장히 만족스러워하여 괜스레 뿌듯한 날이 생겼다. 누가 보면 그 칵테일 좋아하나 봐? 묻겠지만 그런 이유는 아니다. 내가 진토닉을 얼마나 자주 마시냐 묻는다면 여전히 일 이년에 한 번씩 마시는 수준이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 진토닉이 웩, 하는 맛인 줄 까맣게 잊어 주문하던 사람에서 시원한 향긋함이 좋아 자의적으로 ’ 핸드릭스 진토닉‘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리님의 제안이라는 우연한 계기로 취향의 세계가 확장된 것이 너무 좋아, 좋은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순수한 의도. 메뉴판에서 ‘핸드릭스 진토닉’을 마주할 때면 그때 그 시절 대리님이 떠오른다. 매일같이 출근해서 만나고 가끔 술잔을 부딪히던 우리가 이제는 일 이년에 한 번씩 이렇게나마 마주하는 걸로. 그렇게 추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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