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초, 독일에서 귀국하면서 2주간 자가격리를 했어야 했는데 할 것도 없고 당시 피피 드림이 무산됐던 것이 아쉬워 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어차피 어설프게 공부해서 회화는 힘들 거고 나중에라도 다시 태국에 가면 여기저기 붙어있는 글자라도 읽어보자는 생각에 처음엔 읽고 쓸 줄만 알자는 마음이었다. 태국어를 배우기 이전에도 영어를 포함해 외국어를 세 개씩이나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일단 새로운 언어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이번에도 어쩔 수 없었다. 자가격리가 끝나고도 태국어 공부를 계속하면서 케이무크(k-mooc)에서 태국어 문장 만들기 수업까지 아주 열심히 듣고는 수료증도 받고야 말았다.
나는 외국어를 접할 때 대체로 언어 고유의 호흡, 리듬, 인토네이션 등 청각적 요소에서 촉발되는 감각에 매료되는 편인데 태국어만큼은 문자에 매료된 경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건 그저 태국어를 많이 들어 볼 기회가 없어서였던 것. 자꾸 듣다 보니 태국어 나름의 소리에 점점 매력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생각해 보면 태국어를 배우고 싶다 생각하기 훨씬 이전에 우연히 태국어 버전의 세일러문 주제가를 듣게 되면서 귀가 쫑긋 했던 기억도 있고.
그렇게 태국어까지 (조금이지만) 배워뒀겠다 코로나로 못 가 아쉬움만 남았던 피피를 드디어 가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간 태국어를 많이 까먹어 이제 문장 만들기 따위는 할 줄 모르지만.. 들뜬 마음에 다시 기억도 되살릴 겸 열심히 태국 음식 리서치를 하며 여행날짜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가지고 있는 다이빙 장비라 봤자 아이폰 하우징, 마스크, 다이빙컴퓨터* 정도지만 주섬주섬 묵혀둔 장비들을 챙기고 언제나처럼 산호친화적(coral-friendly)** 선크림도 잊지 않고 동생과 함께 드디어 태국으로 일주일간의 여행을 떠났다.
*수심, 다이빙 시간, 안전정지 시간, 무감압 한계시간 등 다이빙할 때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는 기계. 주로 손목에 찰 수 있는 시계형태를 하고 있다.
**산호를 죽인다고 알려져 있는 옥시벤존(oxybenzone)과 옥티녹세이트(octinoxate) 등이 포함되지 않은 선크림.
평일 출발이라 동생 일이 끝나고 저녁 비행기로 방콕에 도착해 우선 하룻밤을 묵었다. 방 창문 너머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호텔 옆 골목길을 구경하던 밤이 지나고 아침 일찍 푸켓으로 넘어가 공항에서 일단 아침을 먹었다. 태국어 공부할 때 음식 이름부터 시작했던 건 몹시 현명한 선택.. 처음으로 태국어로만 된 메뉴를 읽고 태국어로 주문해 내고야 말았다. 알러지가 있는 땅콩을 빼달라는 말까지 태국어로 전달하고 나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피피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면 공항에서 항구로 이동해야 하는데 항구까지 가는 밴을 예약해 둔 터라 시간 맞춰 차를 타러 가야 했다. 음식 먹을 시간이 부족해 미리 준비해 간 푸드 컨테이너를 써먹었던 것도 뿌듯.
라사다Rassada항으로 도착해 행선지가 표시된 스티커를 받아두고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배에 올랐다. 쨍한 해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두 시간이 걸려 드디어 도착한 피피. 시끌시끌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우리 남매는 많이 붐비지 않으면서 너무 중심가와 멀지 않은 곳에 예약해 둔 숙소를 찾아갔다. 가격도 꽤 저렴하고 바다 바로 앞에 위치한 데다 방 사진도 너무 좋아 보였던 Cozy Seafront Resort..
아니었다. 하나도 cozy하지 않았다. 뷰만큼은 인정. 하지만 침구를 비롯해 방의 위생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지 못했다. 기가 막혀 사진을 여럿 찍어놨지만 이곳에 올려서 굳이 비주얼 테러를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주 많이. 그래도 여행 첫날인데 방 컨디션에 마냥 충격만 받고 있을 수 없던 우리는 조금은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우선 섬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2년 전 독일에서 피피행 계획을 짤 때부터 생각해 둔 다이빙 샵 Blue View Divers. 환경 문제에 책임감 있어 보이는 모습이 좋았고 소규모로 다이빙을 진행하는 것도 마음에 드는 데다 산호 복원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곳이라 여기저기 비교해 볼 것도 없었던 곳이다. 샵에 들러 미리 예약해 둔 다이빙 일정부터 컨펌하고 섬 곳곳에 있는 고양이들 구경을 하며 걸어 다니다가 조그만 시장 골목 같은 데서 냉동 상태의 뱃피쉬Bat fish로 추정되는 생선도 봤다. 아직 로그 수*도 50이 채 안 되는 초보 다이버 눈에는 바닷속에서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으로도 제일 소름 끼치게creepy 생긴 생명체로 꼽히는 것이 뱃피쉬인데 이렇게 스티로폼 박스 안에 죽은 모습으로 있는 뱃피쉬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살아있는 모습과 죽은 모습 중 어느 편이 더 creepy한지 모르겠는 뱃피쉬..
*log 수=다이빙 횟수
다이빙 샵 주인이자 다이빙 내내 우리를 가이드*해 줬던 크리스가 추천해 준 Ae fish bbq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섬 여기저기 구경을 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현지인들이 주로 사는 곳으로 보이는 인적 드물고 어두운 곳을 지나면서 우리는 맹꽁이 소리를 생전 처음 들었는데 들려오는 소리가 자연에서 나는 소리인지 인공적인 소리인지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초현실적인 분위기 속에 밤길을 걸었다.
*다이빙은 위험 요소가 많은 나름 익스트림 스포츠. 펀다이빙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이 있다고 혼자서, 혹은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끼리 다이빙할 수 없고 일정 수준 이상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의 인솔하에 다이빙해야 한다.
영국에 있을 때부터 지독하게 앓는 편두통(혈관성 두통)이 있는데 처방받은 약을 제때 먹지 않으면 속이 메스꺼워 밥도 못 먹을 뿐 아니라 먹은 게 없어도 게워 내고 온종일 누워 하루를 다 망치고야 만다. 여행 둘째 날 약을 먹어도 듣지 않는 편두통이 와버렸다. 동생만 다이빙을 보내고 하루 종일 방에 누워있었는데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아파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침대가 찝찝해 미칠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중심가에선 벗어났다지만 여전히 바다를 향해 있어서인지 근처 로달룸Loh Da lum Bay에서 밤마다 파티를 하며 섬이 떠나가라 음악을 틀어놓는 바람에 조용한 저녁도 기대할 수 없었다. 남아있는 예약 기간 일부를 환불받을 수 있을까 했지만 잠깐의 실랑이 끝에 안 되겠다고 판단, 돈이고 뭐고 어서 다른 쾌적한 방을 찾기로 했다.
골라놓은 두 개의 숙소 중 어느 하나도 남은 기간 동안 쭉 가능한 곳이 없어 일단 Blu Monkey라는 곳에서 1박을 하고 다시 P2 Wood Loft라는 곳으로 옮겨 나머지 기간 동안 머물기로 했다. 코지 어쩌구에 비하면 너무너무 깔끔하고 귀엽기까지 했던 블루 몽키. 심지어 페트병에 담긴 물이 아닌 유리컵이 준비돼 있어 복도에 있는 정수기로 물을 떠 마실 수 있게 해 뒀다. 텀블러, 푸드 컨테이너, 설거지 비누까지 챙겨간 나에겐 너무 감동적인 포인트. 동생과 나는 각자 침대에 누워 진정한 cozy함에 한참을 취해있다가 편히 몸과 마음을 누이고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부터는 드디어 나도 다이빙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