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화 세계의 주인 - 서로의 곁을 지킨다는 건

주인의 용기에 빚진 우리

by 투명서재

영화 세계의 주인 - 서로의 곁을 지킨다는 건


주인의 용기에 빚진 우리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로의 곁을 지킨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이 영화만큼 ‘곁’이라는 단어를 진하게 보여준 작품이 또 있을까요?


숲속 나무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랍니다.


상처 입은 나무 하나가 쓰러지지 않도록 옆의 나무가 버팀목이 되어주듯, 영화 속 인물들도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습니다. 누군가 포기하려 할 때 옆에서 손을 내밀어주고, 덕분에 아무도 완전히 쓰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곁’이란 것이 완벽한 안정은 아닙니다. 서로의 마음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오히려 위로가 피어납니다.


때로는 거센 바람 때문에 거리가 갑자기 가까워져 서로의 잔가지가 스치고 상처를 내지만, 금세 어루만지며 다시 곁을 회복합니다.



이 영화는 ‘흔들리는 곁’이 가진 진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상처가 회복되기 위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고군분투해야 하는지를 섬세하게 드러냅니다.


예고편만 봤을 때는 단순한 청소년 성장 드라마 같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훨씬 깊고 복합적인 주제가 숨어 있었습니다.


무겁고 복잡한 이야기를 이렇게 발랄한 연출로 풀다니 놀라웠습니다.


우리는 모두 살면서 ‘별일’을 겪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별일 아니었어’라고 쉽게 넘기지 못하죠.


길을 걷다 넘어졌다면 훌훌 털고 일어서는 게 가장 좋겠지만,
충격이 너무 크면 이유를 찾기 시작합니다.


“왜 하필 여기서 넘어졌을까? 다른 길은 없었을까?”


후회와 자책이 밀려오고, 신체적 고통보다 마음의 후폭풍이 더 괴롭습니다.


영화 세계의 주인, 출처 네이버 영화 소개


이 영화의 주인공 ‘주인’은 자신의 고통을 말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고통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지우기 위해, 또는 버티기 위해 몸을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픔이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몸은 고통을 견디는 방식으로 ‘움직임’을 택합니다.



극 중 한 아이의 대사가 오래 남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지.”


아프냐는 질문에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 그게 진짜 고통입니다.

과한 행동이나 이중적인 태도도 트라우마의 언어일 수 있습니다.
고통과 마주하지 않으려 애쓰다 보면, 사람은 고통과 가장 먼 지점으로 달려갑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그 속은 무너져 있습니다.



트라우마가 깊어지면 ‘진짜 나’와 ‘가짜 나’의 경계가 분명해집니다.
둘 다 결국 ‘나’입니다.


고통을 덜어내려 해도 완전히 떼어낼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 흔적은 외부로 드러나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도대체 뭐가 진짜 너야?”

그때부터 피해자는 말하지 못하는 고통과
“왜 그러냐”는 질문 사이에서 이중의 고통을 겪습니다.


용기 내어 자신의 피해를 표현하면,
상대는 그 크기에 놀라며 또 다른 상처를 남깁니다.

그게 바로 2차, 3차 피해로 이어집니다.


〈세계의 주인〉은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는 주변인들,
피해자의 이중고, 그 속에서 진정한 ‘곁’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영화입니다.



담임선생님, 태권도 사범, 비슷한 상처를 가진 이들
그들의 묵묵한 존재 덕분에 ‘주인’은 이름뿐인 주인이 아니라,
진짜 자신의 주인이자 세계의 주인이 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유미의 세포들로 배우는 내면가족체계치료(IF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