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행 휴가는 단비 같은 설렘이다. 출발일이 다가올수록 콧노래가 늘어간다. 지인들을 위한 선물을 사고, 여름옷을 챙기고, 수화물 무게에 맞춰 짐을 싸는 내가 마치 수학여행을 기다리는 고교생이 된 것 같다.
허나,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바로 고이고이 키우고 있던 반려식물들이다. 일주일만 물을 안 줘도 잎이 축 쳐지는데, 3주 동안 못 보다니. 다행히 작은 화분 몇 가지는 지인의 집에 맡길 수 있었다. 문제는 차에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커버린 아보카도 나무다! 저 아이들을 어째야 할지 걱정이다.
1년 3개월 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집은 마치 흰 도화지로 둘러진 병원 같은 느낌이었다. 커다란 창과 높은 천장, 흰색 페인트칠이 돼있는 벽. 뜨거운 중동 바람이 부는 아부다비에 이렇게 냉랭하고 썰렁한 집이라니! 미니멀 라이프로 살아보겠다고 최소한의 짐만 부친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황량한 거실에 가구도 별로 없으니 목소리가 벽을 타고 왕왕 울렸다.
화분이 있으면 허전한 공간이 채워질 것 같았다. 원예용품을 파는 잡화점에서 작은 마리안느를 샀다. ‘하나만 사면 외롭지’하면서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다시 나의 식집사 생활이 시작됐다. 정성 들인 화분들을 처분하는 것이 얼마나 쓰라린 일인지 겪었으면서도 초록색 잎에 마음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자제해야 한다. 더 늘리지 말자’ 다짐했다.
하지만 다짐과는 다르게 일조량도 충분하고, 온도도 적당하니 씨앗을 발아시키면 재미있겠다 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장난 삼아 오렌지와 레몬에서 나온 씨를 물에 담갔다. 어라? 싹이 난다. 먹고 난 망고씨도 심어봤다. 어라? 이것도 싹이 난다. 아보카도도 심어봤다. 어라? 이것도? 망고는 자라다 말아 실패했지만 오렌지, 레몬, 아보카도는 아직도 자라고 있다.
아보카도는 재밌다. 아보카도 씨는 갈색 껍질로 쌓여있다. 살살 물에 씻으면서 갈색 껍질을 벗겨내면 하얀 속살이 나온다. 어떤 이는 이쑤시개를 꽂아 물에 담가놓는다고 하는데, 나는 반 정도 잠기도록 그냥 담가놨다. 일주일쯤 지나 씨앗 틈 사이로 뾰족하게 싹이 올라온다. 그리고 반대쪽에 뿌리가 나기 시작하면 흙에 옮겨 심어준다. 그리고 나면 기특하게도 물을 주는 족족 쑥쑥 자란다.
그렇게 아보카도는 나의 반려식물이 되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화분을 살핀다. 안쪽에서 새싹이 돋고 있으면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다. ‘밤새 안녕했니? 나도 안녕이다!’ 인사를 건넨다. 하루하루 새롭게 돋아나는 초록색 잎사귀들은 무료한 아부다비 생활에 큰 기쁨을 주었다. 작은 플라스틱 과일 통에서부터 두 번의 분갈이를 하고, 작은 새싹에서부터 내 키만큼 자란 아보카도 나무에 일 년 넘게 정성을 들였다. 쌀뜨물을 담아놨다가 부어주기도 하고, 비료도 주었다. 가끔씩 욕실로 가져가 샤워를 시키고, 응애가 보이면 하나하나 닦아 제거했다. 성공적으로 자란 아보카도는 3개인데, 1호는 위로만 길쭉하게 자랐고, 2호는 동시에 줄기 두 개가 나서 풍성하게 자랐고, 3호는 가지치기를 해줬더니 옆으로 곁가지가 나왔다. 꽃피고 열매 맺기까지는 기대할 수 없지만, 손가락 굵기의 줄기에서 손바닥만 한 잎이 나왔다. 도화지같이 하얀 벽에 초록색 이파리는 무척 잘 어울린다. 이 정도면 훌륭한 플랜테리어다.
그런 아보카도 나무를 3주 동안이나 방치한다면 고사될 것이 뻔하다. 이것저것 검색하다 보니 자동급수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었다. 큰 물통에 물을 가득 담고, 털실 한쪽은 물통 안에, 다른 한쪽은 화분에 심어놓으면 실을 통해 물이 빨아들여져 화분에 수분이 공급된다는 것이다. 호기심과 실험정신이 발동했다. 이곳은 날씨가 더우니 빨대 안으로 실을 연결하면 증발을 막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통과 털실, 빨대를 연결해서 자동급수시스템을 만들었다. 초등학생 장난 같았지만, 3주만 잘 버텨주기를 바랐다.
한국에 있는 동안 문득문득 아보카도가 궁금했다. 자동급수는 잘 되고 있는지, 환기가 되지 않아 벌레가 올라오지는 않았는지, 내가 없는 3주 동안 잘 지내고 있을지..
현관문을 열자마자 화분들을 빠르게 스캔했다. 2호와 3호는 잎이 말라있다. 하지만 줄기는 마르지 않아서 가지치기를 하면, 새순이 나올 것 같다. 1호는 훌륭히 버텨주었다. 게다가 두 손 벌려 환영하듯, 곁가지가 자라 있다! 키도 훌쩍 커져서 다시 분갈이를 해줘야겠다. 기특하고 기특하다!
화분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미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 속에서 생명이 움트고 있는 걸 발견하면 그저 신비스러울 뿐이다. 내 안에 ‘키워내는 것’에 대한 흥미와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즐겁다. 이 맛에 자청해서 식집사가 된다.
한국을 떠나며 한없이 아쉬웠던 마음이 씩씩하게 버텨준 아보카도를 바라보며 사그라졌다.
“안녕! 다시 만나 반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