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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부부 Oct 21. 2019

'남자 친구'와 '신랑' 사이

by 베를린 부부-chicken

38살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기 전까지, '결혼'이라는 단어를 꺼냈던 적이 없지는 않았다. 매일을 사는 모습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가지 배경으로 나와 별로 인연이 없었지만.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자주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은 잔소리 예방용으로는 훌륭했으나 그것도 1년에 한 번씩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보기 좋게 무너지곤 했다. 아주 부드럽고 잔잔하게 시작해 클라이맥스는 항상 '결혼'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는, 내 나이 또래 여느 누구와 같은 부모 자식 간의 대화가 오갔다. 그즈음의 나는, '결혼'에 대한 가능성을 아예 닫지는 않았으나, 어디서 누구를 만나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등에 대한 막막함에 모든 자신감을 빼앗긴 상태였다. 매일매일을 사는 일상 외에 누군가를 만날 기회도 없었고 소개팅이나 우연히 사람을 마주칠 기회는 더더욱 없었으며 그와 함께 의욕도 서서히 잃어 가고 있었다. 사람 만날 기회가 적어서라고 습관적으로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이것이 정말 기회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 내가 피하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그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는, 아주 바람직한 방법은 대상이 결여된 상태에선 그저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대신 스스로 세운 하나의 원칙은 되도록 지키려고 노력했다. "적극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전혀 아닌 것 같은 상황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굶주려서 라기보다 평소 나의 인생관과도 좀 연관된 원칙이다. 결론적으로 아내와 만난 것도 이런 과정 중 하나였다.


아내와는 꽤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으니 ‘만났다.’보다 ‘사귀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전 '건축으로 먹고 살기-바르셀로나 편'의 이야기가 배경이 된 2013년의 상황 후 3년 여가 더 지난 2016년 경이었다. 당시 그녀의 주변 상황은 나와 달리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의 정의도 훨씬 넓었다. 나이와 성별은 물론 하는 일도 천차만별이었다. 베를린에 사는 나보다 더 외국적으로 살고 있었다. 특히 나이차를 넘어서는 '친구'의 개념은 나에겐 어려운 부분이었다. 나에게는 왜 이런 친구의 관계가 없을까에 대해 나도 여러 날 원인에 대해 고민했으나 아직도 뚜렷한 진단명은 없다. 내가 단 하나, 아내와 그녀의 친구들 사이를 보며 발견한 단서가 있다면  이름이나, 언니, 오빠, 형 등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명칭이 아닌 그들만의 애칭으로 서로를 불렀다. 마치 인터넷 동호회 모임에서 아이디로 서로를 부르듯이 말이다. 심지어는 각자의 반려동물의 이름을 대신 부르기도 했다. 참으로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조그마한 일상생활의 차이는 ‘결혼’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에도 드러났다. 대체로 균일하게 일찌감치 대학 졸업 후 회사를 다니며 가정을 이룬, 나를 가장 특이한 사람으로 만드는 친구들이 대부분인 나는, 전통적인 결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랬었다고 판단된다.) 아마도 나도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친구들과 비슷한 시기에 누군가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 주변의 다양한 삶을 영위하는 친구들을 보며 ‘아, 내가 좀 답답한 편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된 연애를 시작할 때 '결혼'을 전제로 만난 것은 아니므로 연애를 시작할 때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때의 현실적인 문제들은 아주 다른 차원이었다.


롱디도 롱디 나름이지 서울에서 베를린이라.. 일 년에 몇 번 보는 걸로 어떻게 연애를 하지.. 그래도 감정이 생길까... 이렇게라도 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나..


이 지점에서 우리 둘 중 생각이 너무 많았다면, 그래서 더 주저했다면, 아마도 우리 둘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냥 카르페디엠으로, 오늘의 감정에, 오늘의 생각에 집중하자였다. 각자의 자리에서의 각자의 일상에 대해 각자 대체로 만족하며 살고 있으니 살짝의 에너지를 조금 더 쏟아 둘이 볼 때 더 즐겁자는 콘셉트이었다. 몇 달에 한 번은 다녀가야 한다, 얼마나 매일 연락을 해야 한다, 뭐 그런 것들은 정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카톡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어색하게 주말 화상통화가 시작됐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첫 번째 비행기표를 사자는 데까지 왔다. 처음 시작이 서울이었으므로 두 번째 만남은 베를린이 되었고 그녀가 베를린으로 오기 위해 참으로 자잘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숙소를 정하고 일정을 결정하고 등등 불확실한 마음의 두 남녀가 외지에서 만나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처리해나갔다. 나름의 콘셉트가 있었다면, 지난번 서울에서 얼굴을 본 뒤 몇 달이 시간이 지났지만 그 시간에 이어 만나는 것처럼, 몇 달의 시간을 지우고 최대한 감정을 이어가자는 것이었다. 참 이렇게 글로 쓰고 있자니 좀 하찮기도 하고 살짝 쓸데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감정들을 우리는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렇게 조심조심, 살짝살짝씩 왕래하며 조금씩 같이 있는 시간을 늘려가며 드디어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한 도시에서 여느 누구들처럼 연애를 했다면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됐을까' 상상해본다. 그러나 당시의 그녀와 나에게는 롱디가 아주 딱 맞는 방식의 연애였다. 30대 중후반의 남녀가 자신의 일상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고민하게 되고 그래서 주저하게 되고 그래서 포기하기도 한다. 내가 정말 예전보다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까. 지난 시간들을 모두 잊을 수 있을까. 내가 겪어보지 못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우리의 연애를 주저하게 만드는 고민들은 너무 많다. 그래서 그녀와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거리의 롱디가 잘 맞았는지 모른다. 내 일상을 99%에 놓고 상대방을 1%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으니 어차피 몇 번 보지 못하는 동안 고민할 게 다 하고, 잡념도 다 해보고, 부질없는 생각들도 해 보는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시간 동안 인연이 더 이어지지 않는 가면... 그것도 아마 인연의 일부일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 부부는 만난 횟수는 많지 않으나 한 번 만나면 정말 24시간을 붙어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애 방식이었다. 그래서 싸울 때도 화끈하게 싸우고 풀 때는 빨리 풀어야 했다.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말이다.

이 과정 중에 우리가 한 도시에 산다면 그게 서울이 될까, 베를린이 될까에 대해 고민을 했다. 사실 나도 10여 년간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조금 더 솔직하자면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한도 끝도 없는 '혼자의 상태'를 이 기회에 아내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까지 가깝게 지낼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고도 싶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베를린에서 시작을 했다. 막연한 마음으로 우리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으로 가는 것이 베를린으로 오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경험해보지 못한 것도 너무 나도 많았고 몇 년 뒤에 문득 한국으로 가자는 생각이 들면 그때 다시 결정해도 된다고 위로하며 우리는 결정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아직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사람의 마음속 씨앗이 새삼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내가 그녀의 '아는 사람'에서 '애인'이 되고 '신랑'이 되기까지 과정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더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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