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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부부 Nov 11. 2019

‘남편’과 ‘아빠’사이 - 10달의 기다림

by 베를린 부부-chicken

스톡홀름에 여행을 다녀온 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아마도 우리 아이가 세상에 나오기 전, 우리 부부가 순전히 둘이서 떠나는 마지막 여행이란 의미가 가장 컸다. 뭐 물론, 뱃속의 아이도 함께 간 것이니 셋이서 가는 첫 여행이라고 표현했으나 “그래도 뱃속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라는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선조의 지혜가 이제는 이해가 간다. 아이가 아직 엄마의 뱃속에 있어 아빠랑 엄마 둘만 움직이는 것과 아이까지 셋이 움직이는 것은 스케일이 다르다. 그렇게 다녀온 여행 뒤, 이제는 본격적으로 아이를 맞이할 마음과 현실의 준비를 해야 했다.


처음 아내의 임신소식을 들었을 때가 선명하다. 사실 그 전날 잠들기 전 아내가 뜬금없이 지난밤 꿈이 좀 이상했다며 이야기를 해 주는데 누가 들어도 확실한 ‘태몽’이었다. 아직 확실한 게 없고 일단 검사를 하기 전이기에 최대한 요란 법석하지 않게 아내를 안심시키고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출근길에 오른 나에게 아내가 바로 전화가 왔다.


“오빠, 나 임신한 거 같아”


정말 기쁘고 몽롱했다. 다시 집으로 뛰어들어가 이 기쁨을 함께했다.


사실 시기적으로는 살짝 갑작스러운 면이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지 두 달여 정도가 지난 시기였고 결혼식 후 하던 일 및 살림들을 정리하고 아내는 베를린으로 입국한 지 3주 정도밖에 안된 시기였다. 적응은 커녕 주소지 등록만 갓 끝난 상황이었다. 그녀에게도 베를린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고 나 역시 그녀가 자신을 시간을 최대한 천천히 쓰며 조금씩 적응하기를 바랐다. 베를린의 여름도 최대한 즐기며 우리의 신혼생활을 담을 신혼집도 꾸미며 여행도 다니며 아무튼 많은 계획들이 있었다. '신혼'이 바로 '임신'이 된 것이다.

‘아이가 생기면 낳는다’ 정도의 합의만 있었던 우리에게 우리 아이는 정말 문득 찾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 갖는 시기를 조절하기 위해 어떠한 장치도 없이 지낸 기간이 상당했기 때문에 아이가 생기려면 진작에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그 특정시간대를 선택했다.


그렇게 산부인과에 다니기 시작하며 출산까지 10달의 길고 긴 여정이 시작됐다. 먼저 산부인과에서 “임신입니다! 축하합니다!”하는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주변에 조언을 구해 찾아간 우리의 담당의는 아직 아이의 핵이 안 보인다며 일주일만 기다려보자고 했다. 이게 늦게 수정되어서 일 수 있고 아님 임신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우, 입이 여러모로 간지러웠다. 그러나 아내를 위해 최대한 침착했다. 자칫 내가 심리적으로 동요하다간 그녀의 감정도 왠지 그네를 탈 것 같았다. 그렇게 덥고 더우며 지루한 일주일이 지나 우린 드디어 담당의에게 확진을 들었다. 살짝 구식으로 보이는 장비로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그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뭐가 뭔지 모르겠는 사진으로 우리 아이가 엄마와 함께 있음을 설명해줬다. 그러며 줄줄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그리고 그 날, 부모님들께 전화를 드렸다. 안정기에 접어드는 3달을 기다릴 수도 있었으나 아내의 입덧이 생각보다 일찍 심해져 얼른 음식이든 뭐든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날짜 상으론 임신 2개월째 초음파다운 초음파 검사를 했다. 사실 담당의가 돋보기안경을 위로 추켜세우며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으면 뭐가 뭔지 모른다.
임신 5개월째 2차 기형아 검사 때쯤 되자 제법 아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우리 아이는 움직임이 많아 초음파 때마다 애를 먹었다.


임신 초기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몇 달 뒤에는 두 주에 한 번씩, 중기를 넘으면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산부인과를 갔다. 보통 아빠가 바쁘면 같이 못 갈 수도 있다고 하나 우리는 심한 아내의 입덧과 언어문제 때문에 항상 함께 가야 했다. 사실 독일어로 설명을 듣는 것은 들어도 잘 알아듣기 힘들기 때문이다. 차라리 영어로 진찰해주는 산부인과가 어떠겠냐며 추천도 받았지만 사실 각종 의학용어 등과 배경에 대한 설명은 영어나 독어나 모르기는 매 한 가지였다. 그래서 항상 정기검진을 가기 전 여러 자료와 인터넷을 뒤지며 이 시기에 어떤 검사를 하고 어떤 결과들이 가능하며 등등을 미리 학습해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필요한 질문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뭐니 뭐니 해도 독일에서 임신과 출산, 육아의 시간을 경험한 주변분들의 든든한 염려와 배려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됐다. 안 그래도 처음 겪는 어리둥절한 시기에 이런 세세한 도움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다행히, 우리의 아이도 잘 자라주었다. 아내의 가까운 사촌도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해서 한국에서는 언제쯤 무슨 검사들을 하는지, 혹시 우리가 빠트리건 없는지 양쪽으로 체크가 되는 것도 좋았다.


임신 초기에, 그러니까 1차 기형아 검사를 하기 전, 정밀 피검사를 통해서 기형아 여부를 더 빠르고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검사가 별도의 비용으로 가능하다고 조심스럽게 전달을 받았으나 고민 끝에 하지 않았다. 그냥 일반 검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주변의 조언 덕분이었다. 결국 우리가 10달 동안 병원비로 지불한 비용은 기형아 검사와 관련한 100유로 남짓과 몇 유로의 약값 정도였다. 내가 베를린에서 건강보험을 쓴 적이 거의 없어 보험료에 대해 항상 억울했는데 우리 아이를 통해 아주 말끔히 정산된 것 같았다.


회사는 진작에 출산예정일에 맞춰 육아휴직을 신청해놨었다. 최장 1년까지 연속으로 휴직이 가능하나 주변의 동료들의 경우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달 정도 일을 쉬며 아이를 같이 보는 게 보통이었다. 이게 세세하게 들어가면 다른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엄마와 아빠가 같이 일하면 둘이 합쳐 14개월까지 가능하고 둘 중에 한 사람이 일할 경우에는 12개월이니 뭐 등등 말이다.

나는 일단 2달의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그리고 그 두 달의 휴직기간 동안 장모님과 어머니가 차례로 베를린에 다녀가셨다. 이 육아휴직이라는 제도가 아이의 출생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아이가 출산예정일보다 빨리 나오느냐 늦게 나오느냐가 항상 예민한 지점이었다.  빨리 나오는 것보다 늦게 나오는 것이 좀 복잡했는데 이 경우 연차를 써야 하는 것이 조금 속이 쓰린 경우였다. 우리 담당의가 9번째 정기검진부터 아이가 빨리 나올 것 같다고,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 놓는 것이 좋겠다는 당부를 반복해 우리 부부는 버얼써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병원에 가져갈 가방 등도 미리 준비하고 여차하면 연락해야 할 곳도 미리 정리해두었었다. 아이가 막달에 훅 커진다 하여 사실 출산예정일은 특히 엄마에게 예민한 문제다. 예정일을 지나 출신을 하신 분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극한의 상황을 묘사해주시곤 했었기 때문이다. 나도 아이가 나오면 바로 육아휴직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주 붕 뜬 상태였다. 낮에 내가 출근한 사이 진통이 시작될까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스탠바이 상태로 있으니 사실 책상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집중도 잘 안되고 그랬다. 뒤돌아보면 이 시기만큼 건축과 떨어진 삶을 살았던 적도 없었다. 건축뿐만이 아니라 임신 기간 동안 나의 관심사는 오롯이 아내와 아이였다. 결국 날짜가 하루하루 채워져 아이의 출산 예정이 다가오고, 병원에 정기검진도 자주 가게 되고, 장모님은 베를린에 도착하셨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D-Day +1에, 출산예정일 다음 날 세상에 나왔다.

 


우리 아이의 태명은 ‘찰리’다. 나중에 찰리에게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내가 아내를 설득해 그녀가 직접 그린 그녀의 태몽이다. 


https://www.instagram.com/p/Bob8_RHjIKD/?igshid=1fnbadz2pmj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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