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은 항상 있었는데도, 그는 보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항상 있었는데도,
그는 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은 표지도 제목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작가가 헤르만 헤세가 아니었다면, ‘언젠가’의 목록 속에 오래 묵혀 두었을지도 모른다.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굳이 책장을 펼칠 마음이 생겼을까?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싯다르타가 길 위의 우연한 만남들로 깨달음의 단서를 얻었듯 나 역시 우연히 책장에 꽂혀있는 이 책을 마주했다.
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는 모범적인 수련에도 마음 깊은 갈증을 지우지 못한다. 그는 친구 고빈다와 집을 떠나 사마나 수행자들을 따라 금욕을 실천하지만, 그 길 또한 자신을 완전히 채우지 못함을 깨닫는다. 이어 성자 고타마(부처)를 만나 가르침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남의 진리를 따르는 것만으로는 참된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판단해 다시 홀로 길을 떠난다.
도시로 내려온 그는 카말라와 상인 카마스와미를 만나 그 동안의 삶과는 너무나 다르게, 사랑과 부, 향락을 익히며 세속으로 깊이 스며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영혼은 메말라가고, 절망 끝에 강가로 돌아온 그는 뱃사공 바수데바와 함께 살며 강의 소리를 듣는 법을 배운다. 강은 시작과 끝, 기쁨과 슬픔, 과거와 미래가 한몸임을 들려주고, 싯다르타는 모든 것이 동시에 하나임을 체험으로 알아차린다.
"이보게 친구, 자네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싯다르타는 소몰이꾼이 아니고 또 사문은 술주정뱅이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 술꾼도 마비 상태에 들어가고 또 잠시 도피하고 휴식을 얻을지는 모르지만, 취한 상태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이전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 이전보다 더 현명해진 것도 아니고, 새로운 지식을 쌓은 것도 아니고, 몇 단계 더 올라간 상태가 되는 것도 아니란 말일세."
재산이 점점 늘어나면서 싯다르타는 아주 서서히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의 특성,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갖는 철없음과 불안증을 어느 정도 지니게 되었다. 그는 또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되었으며, 그들을 닮아갈수록 부러워하는 마음은 더욱 커졌다.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한 것은 자신에게는 없지만 그들은 갖고 있는 한가지, 삶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줄 알고 격정적으로 기뻐하고 걱정할 줄 알며 현세에 영원히 몰두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달콤한 행복을 누릴 줄 아는 능력 때문이었다.
스스로 삶을 영위하고,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면서 자신을 더럽히고 죄과를 짊어지고, 또 고배를 마시면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려고 하는데, 어떤 아버지, 어떤 스승이 그를 막을 수 있었지요? 사랑하는 친구여, 혹시 누군가는 그런 길을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이 어린 아들을 사랑하고, 그 아이만은 그런 번뇌와 고통, 환멸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해서 그게 가능할까요? 아들을 위해 열 번 죽는다고 해도 당신은 그 아이의 운명을 털끝만큼도 덜어줄 수 없을 겁니다.
이 책은 정답을 내주기보다,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바라보게 만들고, 서둘러 지나치던 마음을 잠시 멈춰 세우게 해준다.
책장을 덮고 나니, 남는 것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작은 태도였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오늘의 일 하나에 조용히 집중하고, 작은 습관이 쌓이면 강처럼 조용히 길이 난다는 깨달음이랄까...
깨달음은 꼭 방황을 통과해야만 할까. 헤르만 헤세는 오랜 방황과 체험으로 이 이야기를 빚어냈지만, 우리 모두가 그걸 그대로 되풀이할 필요는 없지 않나. 세속과 수도의 양극을 오가며 시험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자리에서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면 된다. 그 짧은 멈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장 선한 방향을 묻고, 오늘의 한 걸음을 선택할 수 있다.
이 책이 오히려 나에게 주는 메세지는,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된다.
여기에서,
지금부터,
마음이 흩어질 때마다,
하나에 조용히 머물어 보자.
그 작은 숨고르기가 이어져 언젠가 강처럼 길을 낼 것이다.
라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각자의 강이 조용히 흘러가길...
모든 소리가 서로 얽히고설켜
수천 겹으로 엉켜 있었다.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지고,
모든 소리, 모든 목표, 모든 동경,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선과 악,
그 모든 것이 모여
이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모여
사건의 강을 이루었고,
삶의 음악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