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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쁘삐 Jan 29. 2023

10. 의무실은 2층, 식물 의무실은 4층입니다.

식물 의무실 시리즈 : 아픈 식물을 돌봐드려요.

식물 의무실

우리 회사의 의무실은 2층에 있다. 직원들 대부분이 의무실의 위치를 잘 모르는데 나는 의무실의 단골 고객..이라 정확히 안다. 나는 4층 사무실에서 근무하지만 잊을만하면 2층에서도 발견된다.

(나는 믹스커피 봉지에도 손을 베인다. 엄마를 닮았다.)


하지만 늘 환자인 것만은 아니다.


2층 의무실에서는 분명 환자지만, 4층에서는 아픈 식물을 돌보는 식물 전공의로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4층에 있는 우리 사무실은 식물 의무실이다. 개업 이후 많은 환자분들이 다녀가셨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각별하게 치료했던 버킨과 스파티필름의 이야기를 기록해두려고 한다.



필로덴드론 버킨: 과감하게, 초기화.
한 때 버킨이었던 것


하얀 펜으로 스케치한 듯한 잎이 매력적인 필로덴드론 버킨. 그러나 이 친구는 볕이 부족해서 잎무늬가 약해졌고, 사무실에 들어온 초기에는 사람들이 물을 잘 주지 않아 잎이 노랗게 시들어버린 듯했다. 그 와중에 진단 당시 위쪽의 잎은 말려있었는데, 과습으로 추정되었다.


.. 정말 모든 것이 난감한.. 필로덴드론 버킨이었다.


버킨의 3단 분리(살아있는 부분 물꽂이, 작은 자구 분리, 화분 초기화)


우선 소독한 칼로 과감하게 버킨을 잘라냈다. 잘라낸 버킨 중 건강한 부분만을 물꽂이 했고, 작은 자구는 분리해서 심었으며 (최후의 보루..) 잘린 버킨의 밑동은 절단면이 잘 마를 수 있게 바람이 잘 드는 창가에 두었다.

(사진은 잘 마른 밑동의 모습)


밑둥이 잘 마르고 3~4주 정도 지난 뒤의 모습


3~4주간 경과를 지켜보며 주에 한 번씩 물을 주고 환기를 잘 시켜주었다. 별도로 영양제를 챙겨 주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뿌리가 건강했는지 튼튼한 새 잎이 곧잘 자라나 주었다.


버킨에 맺힌 아침이슬


버킨은 쑥쑥 잘 자라나 아침이 되면 이슬로 반겨주었다. 투명한 문진을 만들어내는 듯 아름다웠던 순간.



햇볕이 부족한 동향의 식물의무실이지만, 버킨이 드디어 하얀 잎무늬를 보여주었다. 완벽해.


2022.12. 입원치료가 종료되었다.

(집으로 데려가고 싶다.)


*치료법: 초기화. 적당한 바람. 적당한 물. 적당한 관심.




스파티필름: 연약하지만 힘차게
과장님이 내다 버린 스파티필름(을 주워온 현장)
???: 과장님, 000 주무관이 과장님께서 내다 버린 스파 뭐시기 다시 주워왔던데요?
???: 뭐? 걔 녹지직이냐?!


스파티필름은 찾아가는 방문진료를 진행했다.


식물에 1도 관심이 없는 과장님께서 승진선물로 받으신 스파티필름에 냉수를 시원하게 들이부으시고 한 달. 스파티필름은 모두 시들어버렸고 쓰레기 버리는 곳에 버려져있었다. 꽤나 무거운 세라믹 화분이었는데 직원들도 모르게 직접 들어서 버리셨다. 근데 그걸 또 기어이 주워온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상한 잎을 모두 잘라내고 화분 속 흙을 잘 말리기 위해 식물 의무실 복도 창가에 내놓아 두었다. 문제는 비주얼이 누가 봐도 죽은식물 무더기여서.. 메모를 붙여두었다.


"스파티필름 식물의무실에서 치료 중입니다...."


스파티필름의 부활시그널


밑동까지 바짝 잘라낸 버킨과 달리 스파티필름은 기존 줄기에서 새 줄기가 나올 수 있게끔 어느 정도 길이를 정해 줄기를 남겨두었다.


식물 의무실 내부로 자리를 옮겼다.


식물 의무실 복도는 북향이어서, 어느 정도 새순이 난 뒤부터는 동향인 식물 사무실 내부로 이동해 주었다.


싱그러운 스파티필름


겨울이 되었고, 스파티필름은 계절을 잊은 채 싱그럽게 새순을 내주고 있다. 그 사이 반강제 의뢰인 과장님께서는 새 부서로 이동하게 되셨는데 스파티필름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 이런 게 우리 사무실에 있었던가? 첨 보는 거 같네."


2023. 1. 현재 경과 관찰 중.

(꽃피면 집으로 데려가고 싶다.)


*치료법: 적당한 초기화. 넉넉한 바람과 물. 꾸준한 관심.



*덧붙이는 글.


대부분의 사무실은 식물을 키우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다. 대체로 건조하고, 볕이 잘 들지도, 바람이 잘 통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식물을 키울 마음이 없는 사람들의 사무실로 식물 선물이 오게 되면 총체적 난국이 되어버린다. 기쁜 날에 식물이 함께하는 것도 좋지만, 원치 않는 경우에는 정중히 사양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인쁘삐(IN-FP).

1995년에 태어나 24살부터 시작한 공무원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직업적성검사를 새로 했더니 개그맨이 나와서 결국 못 그만두고 다니는 사람.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는 욕심이 항상 드릉드릉 가득하지만, 사람 많은 곳은 싫어하는 전형적인 INFP.
먹는 식물은 죄다 죽이고 못 먹는 식물은 세상 잘 키워내는 능력치 애매한 식집사.
직장생활 꽤나 힘들어하고 일도 잘 안 맞는데 나름 또 정년퇴직은 하고 싶어서,
숨을 얕게 쉬며 회사를 다니는 20대 직장인.

어느 날 문득, 도대체 나는 왜 이런 사람인지 고민만 할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동안 마주했던 순간들을 털어놓으며 나를 이해해 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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