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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음 Oct 27. 2023

메이킹 필름은 없지만

2023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이곳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을 짐승이라고 부르는 세계. 결국 짐승만 남은 세계. 짐승들은 서로를 핥는다. 서로 앞에서 긴다. 웃는다. 용서 없이도, 화해 없이도. 당신이 나의 애인을 내리쳤나요 나는 애인이 있었나요 나는 무엇인가요 짐승 a가 물으면 짐승 b가 웃는다. 질문은 깊은 것이 되지 못한다. 질문은 질문의 형태를 갖춘 엿. 질문을 핥고 빨고 손가락을 쩍쩍 붙였다 떼며 논다. 놀기에 좋은 그것은 노래가 된다. 짐승. 짐승. 노래는 기억이 아니라 습관이 될 때에야 살아남을 수 있다. 나는 무엇인가요 나는 무엇인가요 살아남고 나면 노래는 짐승보다 오래 간다. 꿈까지 질질 따라 간다. 내가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이긴 했던 것 같아요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꿈은 구원이어서 꿈이 잠깐 찾아올 때 그들은 눈물을 흘린다. 의미가 있었어요 이유가 있었어요 같이 오래 서 있고 앉아 있고 뒹굴고 아프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이야기했어요 몸의 모든 틈에서 흘리는 눈물. 짐승. 짐승. 몸의 틈은 틈의 피부에 기억을 새긴다. 짐승 a는 잠에서 깨어 짐승 b를 바라본다. 잠시 사랑을 아는 얼굴로. 틈에 남은 물기. 정신이 든 짐승 a가 중력 너머의 천사처럼 웃는다. 짐승 b는 무엇도 상관없다는 듯 다가간다. 한 손으론 짐승 a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론 짐승 a의 뺨을 때린다. 짐승 a가 짐승 b의 귀를 물어뜯으며 천사처럼 웃는다. 두 사람은 노래를 흥얼거린다. 용서 없이도, 화해 없이도. 이 세계 바깥의 누군가는 슬픔을 머금고 뒤돌아보는 짐승 a의 얼굴을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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