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면서 차가 마시고 싶다는 것은, 차를 마시고 싶다는 뜻입니다.
차 마시고 싶다…….
화창한 7월 오후, 저는 컴퓨터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손에는 앤틱 마켓에서 사 온 금장 테두리 찻잔이 들려 있었고, 잔 안에는 어제 주문해서 배송받은 베티 나르디(Betty Nardi)의 리치 우롱차가 따끈따끈하게 우려져 있었지요. 그러니까 차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는데 차가 마시고 싶어진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일터에 있었고, 컴퓨터 작업을 하면서 차를 마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잠시 숨을 돌리는 와중 SNS 피드에 올라온 찻자리 사진을 본 것이었지요. 마루 위에 알맞게 비치는 햇볕, 엷은 완두콩 색 차 통에 꼭 어울리는 빛깔과 무늬의 수건. 그 위에 걸쳐진, 나무 줄기를 닮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놓인 차시. 고요와 조화가 있는 차의 시간이 그 한 장에 담겨 있었습니다.
아, 차 마시고 싶다.
저는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비록 몇 초 전에 저는 입에 차를 머금은 참이었지만 저는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손에 차를 든 채 제가 마시고 싶었던 차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물보다도 그 따뜻함과 향기로움에 집중할 수 있는 순간, 공간과 시간의 한적함 속에 느껴지는 조용한 차의 아름다움 같은 종류였던 것이지요.
〈언제 한번 차 한잔〉 매거진에서는 지금까지 차를 마시는 시간이 왜 즐거운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매거진 속 작은 시리즈인 〈세상에 없었던 말차 입문기〉에서는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현대의 다도가 필요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즐거운 차 시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차를 마실 시간입니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차를 마실 시간이 필요하다.
이 당연한 말이 어째서 이 세상에서는 좀처럼 성립하지 않는 것일까요? 어떨 때 찻집들에서 하는 이벤트를 보면 주 5일, 매일 여덟 시간 이상 일하는 직장인의 애환은 반영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한가로운 수요일, 목요일, 평일 낮 시간, 평화롭게도 진행되는 성수동에서의 티 리추얼 세션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걸까요? 물론 하루쯤 연차를 내면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주말이라면 어떻게 시간을 잘 내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그런 스케줄을 보면 종종 떠오르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 시간에 이벤트를 하는 찻집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평일에 뭘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업을 하겠습니까? 언제든 손님이 와야 하는 건 찻집으로서 당연한 일이지요. 문제는, 이렇든 저렇든, 우리에게 차 마실 시간이 참 부족하다는 데 있습니다.
보통 퇴근하면 7시에서 8시, 저녁을 챙기거나 집안일을 좀 하면 9시, 주말에는 밀린 집안일을 처리하고 좀 누워서 쉴 시간도 필요하니 실제 가용 시간은 하루 한나절 정도. 종종 그렇게 평일 늦은 시간 마음을 빠르게 가다듬고 마시는 말차가 심신을 풍족하게 채워 준다는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에게는 차 마실 시간이 부족합니다. 일을 안 할 수도 없는데 말이에요.
모두가 19세기 귀족처럼 살 수는 없고, 현대에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되니,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서민의 다도가 이 시대에 새로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저는 정말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다도는 다른 다도들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히고, 나와 주변을 풍부하게 느끼는 시간이 되고, 일상 속 비일상의 시간을 넉넉히 내어 고요한 시간을 관조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꾸준히 시간을 낼 여력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를 다도 하는 시간으로 빼 둘 수 있을까요? 주말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평일 중 언젠가를 다도를 위한 시간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일이 더 불규칙한 사람이라면요? 다도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져 있는 시간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때, 다도를 위한 물건을 마련하기에는 집안살림을 놓기에도 공간이 부족한 집일 때. 때로 시간의 부족은 마음의 부족으로 이어지고, 공간의 비좁음은 마음의 좁음으로 이어집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고전 다도에서, '한가로움을 느끼려면 일단 삶이 넉넉해야 한다' 고 했지요. 원래부터 쪼들리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런 한가로운 쓸쓸함을 느낄 겨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러나 현대에 와서 다도가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면, 누구에게나 다도를, 다도가 아닌 다른 취미더라도, 그것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여유 시간과 자금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일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조건을 꼽으면서 일하는 의미보다도 먼저 일에 대비한 충분한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넉넉한 생활 환경이 필요하다고도 말했지요. 지금 이 글에서 하는 식으로 번역하자면 적어도 집에서 차를 즐길 수 있는 생활 환경이 필요한 것입니다.
취미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물리적 시간과 공간, 여유 자금은 현대 인간에게 사치가 아니고 생활 필수재입니다. 다도가 지향하고, 다도가 줄 수 있는 가치인 비움과 비 일상 공간의 여유는 물론 그런 최소한의 여유를 필요로 하지요. 그러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일터에서 차를 마시면서, 한동안 전혀 갖지 못했던 여유로운 시간의 차가 마시고 싶어지는, 바쁘고 열악하기 십상인 우리의 생활 조건에서 모두의 다도를 주창하려면 결국 사회, 인권, 노동의 조건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만 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지금 차를 즐기고 있는 중이더라도요. 조금 더 나은 생활, 그리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모두가 고요히 차 마실 시간 정도는 낼 수 있는 날을 꿈꾼다면 어쩔 수 없이 이 글의 타이틀로 돌아가게 됩니다. 차 마시면서 인권운동 하기.
운동은 별 것이지만 또 어쩌면 별 것이 아니고, 주변의 운동을 조금씩 지지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요. 관련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천천히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자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노동과 삶의 조건에 조금 더 관심을 갖는 것은요? 그것도 물론이지요. '요즘 살기 팍팍하다' 는 말에 그냥 동의만 표하는 대신, '그러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를 고민해 보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가능하다면, 그런 시간에도, 당신의 곁에 차 한 잔이 머무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글을 마무리해 봅니다.
*윌리엄 모리스 : 19세기 영국의 디자이너이자 공예가, 시인, 번역가, 사회 운동가. 산업 혁명에 의해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값싼 물건이 대량 생산되는 데 반대해 과거 장인 정신을 부활시켜 생활과 예술을 통일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모리스의 디자인은 현대에도 여전히 생산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훗날 독일로 건너가 바우하우스 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