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4시간 중에서도 쓰는 시간은 내게 온전한 희열이다. 쓰는 동안 삶의 고통도 오욕도 아득하게 잊힌다. 그런 무념무상의 순간은 명상 혹은 요가와 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매번 글을 새로 시작하는 일은 어렵다. ‘쓰는 행위’에는 마찰력이 존재하는 것일까.
글을 시작할 때면 모니터 위에서 작은 커서가 깜빡인다. 신호등의 빨간불처럼 잠시 기다리다 초록으로 바뀌어 ‘호다닥~’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날은 거의 없다. 하염없이 깜빡이는 커서와 눈싸움을 하다가 안구건조로 먼저 눈물을 흘리는 쪽은 늘 나다. 빈 화면을 넋 놓고 바라보던 순간이 내게 수없이 많았다. 운 좋게 꿈에서 나온 조상님이 불러주신 대로 써서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좋겠지만 인생이란 녀석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글감을 검색해 본다는 핑계로 가끔 핸드폰을 뒤적인다. 우연히 SNS 속에서 얼굴이 주먹만 한 이슬아 작가를 보았다. 질투 나게 아름다운 그녀의 젊은 인생이 글 속에서 윤슬처럼 빛이 나고 있었다. 그녀의 sns는 어느새 젊은이들의 성지가 되었다. 긴 생머리에 뽀얀 피부 고수리 작가는 말해 무엇할까. 그녀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닮은 글은 마치 ‘사랑의 대명사’처럼 느껴졌다.
조용히 ‘좋아요’와 ‘하트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닫았다. 목 끝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얼마 전 출판사로부터 첫 책이 판매부수 저조로 절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토록 과학적인 수치로 사랑받지 못했다는 거부감이 들었다. ‘루저~ 외톨이~’ GD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려왔으나 센척하는 겁쟁이는 되고 싶진 않았다. 도망치지 않고 계속 쓰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첫 문단을 쓰고 또 지우 고를 반복했다. 지금 이 글은 대체 무엇일까 투덜거리며 출판시장의 포지션을 고민하던 찰나였다. 사진 속 한 아이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부모의 손을 붙잡고 서 있다. 부모님이 지어준 밥을 먹고 자라던 시절 그 누구에게나 ‘특별하게’ 여겨졌던 순간들을 지나온다. 그런 나날 누구나 사랑의 대명사였었다. 인생의 절반을 지나며 투덜거리던 생각들을 조금 매만져본다.
누구에게나 시작은 한 때 별이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웃고 노래 부르고 먹고 떠들고 자는’ 그런 평범한 순간들이 부모의 눈 속에 보석처럼 박히던 시절을 통과해 왔다. 누군가 곁을 내어주고 흐뭇하게 바라봐주던 지극히 평범한 세월들이 ㅅ실은 지극히도 감사한 날들이다. 그 시절을 당연하게만 여겼던 자신이 부끄러워 두 볼에 열기가 화끈거렸다.
누군가 내어주는 사랑에 기대어 살아왔다면 이제는 홀로서기를 시작할 때이다. 자신을 스스로 돌보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타인에게 보여지는 모습 말고 진심으로 스스로를 잘 대접했던가 되물어야 한다. 아니, 나는 그러지 않았다. 실패의 순간 부끄러운 감정들을 은밀히 숨기고 치우기에 급급했다. 그런 와중에도 진심으로 누구보다 잘 해내고 싶었다. 번듯하게 해보고 싶었다. 아마도 인정받고 싶었으리라. 인정이 곧 자부심과 사랑을 채워주리라는 착각들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숨 쉬고 말하고 존재하는 모든 순간을 ‘그저 사랑하면’ 된다. 그동안 위태롭게 서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어떤 사람도 제대로 위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음이 태도를 바꾸고 열등감으로 들끓었던 열기가 사그라들면 그 안에 숨겨졌던 자존심이 나타난다. 녀석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크게 부풀었지만 욕심이 빠져나간 자리는 평온을 되찾는다.
내게 존재하던 글쓰기의 마찰력은 ‘두려움’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실패’나 ‘실수’가 퍽 두려웠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전적으로 자신의 손안에 달렸다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졌다.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듯 살아오던 삶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고꾸라지거다. 어릴 적 롤러를 배울 때 손을 짚고 넘어지는 법부터 연습했다. 잘 넘어져야 다치지 않고 탈 수 있다는 게 롤러의 국룰이었다. 어린 마음에 롤러는 안 타고 왜 자꾸 넘어지는 것만 시키냐며 투덜거렸었다. 다치지 않아야 더 오래 탈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넘어지고 나서 알게 되었다. 되돌아보면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잘 넘어져야 ‘일어서는 법’ 또한 배울 수 있다. ‘달리는 것’은 그 다음 문제이다.
피아니스트가 떠오른다. 무대 위의 짧은 연주를 위해 연주자는 온종일 방에서 피아노를 친다. 코앞에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이든 붓을 쥔 화가이든 도기를 만드는 도공이든 온전히 고독을 마주하며 길을 내어간다. 그러다 애써 만든 도기를 망치로 부숴야 하는 날도 온다.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매번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행위는 계속된다. 도전하기에 앞서 실패와 실수에 포용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무엇인가 시작하려면 먼저 자신에게 더 관대해져야 한다. ‘나아가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충만함에 도달할 수 있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글 한 편을 다 써버린 지금처럼 말이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마음은 ‘그냥 내딛기’로 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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