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부모님은 남의 집에 빈손으로 가지 말라셨다. 부모님 말씀이 곧 법이었던 그 시절 아쉽게도 내게는 늘 남는 용돈이 없었다. 친구 집에 갈 때면 새것처럼 깨끗이 본 만화책이나 장난감들을 비닐 포장지에 싸들고 가곤 했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케이크나 떡 다과류를 사들고 갔다. 시간은 없고 주변 상가는 더욱 없어 하는 수 없이 빈손으로 남의 집에 들어선 적 있다. 양말의 구멍 사이로 미안한 마음이 새어나갔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타인의 집을 방문하는 일은 내게 '비밀의 화원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 같다. 친구가 어린 시절부터 자라온 가족시의 질곡을 들여다보는 일은 비밀스럽고 성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아이들에게 집을 오간다는 건 서로에게 은밀한 친목을 과시하는 행위였다. 이와이도시오 작가의 "100층짜리 집" 그림책처럼 우리 주위에는 각기 다른 동물들이 모여사는 건 아닐까 싶었다. 동그란 얼굴에 눈과 귀는 두 개, 코와 입은 하나라는 공식만이 유일한 공통점일 뿐 전부 달랐다. 겉은 비슷해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는 형태가 수 없이 다양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무엇이 보일까'란 시각적인 상상과 달리 가장 먼저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건 후각이다. 문을 열자 냄새들이 와르르 몰려와 후각세포 뺨을 때린다. 섬유와 벽지에 배인 특유의 냄새를 뚫고 천천히 걸어 나오던 건 이질적인 살냄새이다. 그중에서도 음식냄새는 존재감이 최강자였다. 친구 엄마가 내어주시던 깻잎찜이 기억난다. 무심히 던져 넣은 멸치들 사이에서 된장과 함께 졸여진 깻잎은 본연의 초록을 잃고 감자탕 속 우거지인 척 열연을 했다. 그때 친구네 집을 오가며 먹었던 깻잎의 향을 잊을 수 없다. 한 가족이 무얼 먹고 지내왔는지 비밀스러운 음식의 역사가 집 냉장고 속에 꽁꽁 숨겨져 있었다니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 나의 냉장고는 어떨까' 기억을 더듬으며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가장 먼저 김치냄새가 버선발로 마중 나온다. 얼마 전 엄마가 담가준 굴깍두기가 보였다. 요리를 잘 못하는 딸애를 알기에 '손녀들이 굶을 까봐' 심심한 반찬을 해주신다. 시어머님은 '아들이 굶을 까봐' 겉절이를 보내신다. 한 번은 백세가 다 되신 왕할머니가 빚은 김치만두를 받았다. 엄마 손맛을 잊지 못하는 고령의 자식들을 위해 노모가 직접 빚은 만두였다. 할머니는 매년 올해가 마지막일지 모르는 만두를 빚으신다. 늘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말씀도 함께지만 김치 꼬다리까지 잘다져 넣은 만두소는 얼큰하고 시원하다. 엄마는 그 귀한 음식에서 제 몫을 제하고 내게도 보내신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제 자식을 먹이기 위해 요리를 해왔다. 주방속의 냉장고가 시대와 세월을 가로질러 서로에게 연결된 기분이 든다.
살다보면 종종 원인 모를 허기증상 느낀다. 물을 벌컥 들이켜도 목이 타고 무얼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을 때가 있다. 과자나 빵을 먹을수록 허기는 더 커져갔다. 육체적 배고픔이나 갈증이 원인이 아닌 정신적 허기가 찾아온 날이었다. 그런 날 대게 피곤하고 무력해서 냄비에 겨우 라면물을 올린다. 세상 모든 엄마들이 보내준 김치들을 꺼내어 먹다가 눈물 콧물을 다 쏟곤 한다. 할머니가 보내준 김치만두를 한 입 가득 넣고 삼키는데 목이 메어왔다. '이걸 내가 당연하게 받아먹어도 될까' 콧물을 닦다가 김장용 고춧가루로 땡초를 쓴 건 아닐까하는 괜한 의심을 했다. 아삭하고 시원한 김치가 따스한 면발과 국물을 만나 뱃속을 꽉 채우니 다시 하루를 마주할 용기가 났다. 분주히 일어날 시간이었다. 어느 날 냉장고 속에서 엄마의 손맛이 사라지는 날을 상상해 보았다. 그땐 음식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슬픔보다 더 큰 녀석을 상대해야만 할 것 같아 겁이 났다. 마치 냉장고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 여기 있다.'
삶에서 무심코 스쳐지나가는 것들에겐 스포트라이트가 필요하다. 아무것도 아니라 여겨지던 '당연함'에 실은 가격표가 없다. 그 값을 지불하지 않기에 감사하는 법을 자꾸 잊어간다. 감사할 줄 모르는던 순간 자신은 대체로 무례하고 무정한 사람으로 살았다. 당연함이 없이는 평화로운 일상이 단 일 분 일 초도 존재할 수 없다. 너무도 익숙한 '당연함' 그 속에는 누군가의 소중한 '시간'과 '노력'이 녹아있었다. 그걸 '사랑'이라 불러도 될까. 새로운 숙제 하나가 생긴 기분이다. 앞으로 어떤 당연함을 나누는 사람이 될 것인가 새로운 고민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진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