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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Jan 09. 2024

기꺼이 도움 받는 마음

도와달라고 말할 용기

여기 당신의 도덕성을 판별할 문제가 있다.


Q.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도와준다.

(2) 무시한다.


아마 이 글을 읽은 사람 모두가 1번을 정답으로 꼽을 것이다. 실제로 곤경에 빠진 사람을 만났을 때는 내 코가 석자라 흐린 눈으로 못 본 척 지나칠지라도.


두 번째 문제도 풀어 보자.


Q.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누구에게든 도와달라고 한다.

(2) 괜히 다른 사람 성가시게 하지 말고 내 일은 내가 해결한다.


두 번째 문제에서는 의견이 갈릴 것 같다. 나는 주로 2번을 택하는 쪽이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건 어쩐지 멋쩍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라서,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라서 도움을 받는 쪽보다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편이 자연스럽다. 가끔 내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물건을 옮겨야 하거나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을 주어 돌려도 열리지 않는 병뚜껑과 씨름을 할 때는 도와줄 사람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우람한 팔뚝에 어울리지 않는 내숭처럼 보일까 봐 쑥스럽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도움도 받아본 사람이 잘 받는다. 내 인생에서 '도움 받기 집중기간'이라고 부를만한 때가 3번쯤 있었는데, 첫 번째는 첫째를 임신했을 때고 두 번째는 둘째를 임신했을 때이며 세 번째는 바로 지금이다. 임신해서 불룩하게 나온 배는 '배려해 주세요' 배지와도 같았다. 사람들은 내가 서 있는 꼴을 보지 못하고 자리를 내어주었고 내가 짐을 드는 꼴을 보지 못하고 대신 들어주었다. 처음에는 남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가 가시방석처럼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만삭에 가까워질수록 몸이 무거워지니 마음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몸이 편한 쪽을 더 좋아하게 됐다.


늙고 병들기 전에 더 이상의 '도움 받기 집중기간'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인생은 늘 예상하지 못한 대로 흘러간다. 그렇다고 셋째가 생긴 건 아니고 운동을 하다 아킬레스건이 툭 끊어져버렸다. 벌써 한 달 넘게 깁스 생활 중이다. 아직 다친 다리는 땅에 딛지도 못하는 상태라 어딜 가든 목발이나 휠체어가 함께 한다. 두 다리로 멀쩡히 걸어 다닐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도 깁스한 다리로는 어려운 일이 되곤 한다. 목발 짚는 법을 익힐 때도, 혼자 휠체어 타는 연습을 처음 하던 때도 어려웠지만 목발과 휠체어를 제법 능숙하게 다루게 된 지금도 어려운 일은 많다.


가장 힘들었던 날은 퇴원 후 처음으로 외래 진료를 본 날이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그날 병원에 혼자 갔고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병원에 혼자 온 걸 후회했다. 병원 주차장에는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다리가 멀쩡하면 근처 골목에 차를 대고 걸어와도 됐겠지만, 목발을 짚고 걸어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예약 시간은 다가오고 초조한 마음으로 자리도 없는 주차장을 몇 바퀴 돌다가 겨우 빈자리를 하나 찾았다. 병원 출입구와 가장 먼 자리였지만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내가 목발을 짚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병원으로 가는 동안, 보호자와 같이 온 환자들은 출입구 앞에서 차에서 내려 병원 문 안으로 쏙쏙 들어갔다. 다음에는 꼭 남편을 데려와야겠다고 다짐했다.


병원에서 수술 부위 실밥을 제거하고 상처를 소독한 후 통깁스를 했다.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다음 진료 예약을 잡은 뒤 수납을 하러 갔다. 결제를 하고 나가려는데 원무과 직원이 나에게 처방전을 내밀었다. 아뿔싸. 내 두 손은 목발을 짚어야 해서 처방전을 받을 손이 남아있지 않았다. 가방은 거추장스러울 것 같아 차에 두고 왔다. 하는 수없이 처방전을 목발 커버인양 목발 손잡이에 돌돌 말고 병원을 나섰다. 처방전이 손잡이에서 헛돌아 목발을 놓칠까 봐 불안불안했다.


힘들게 도착한 약국 앞에서는 무거운 유리문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병원문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열리는 자동문이라 어렵지 않게 들어갔는데 약국 문은 힘을 주어 밀어야 열리는 여닫이문이었다. 목발 두 개를 한 팔에 모아 안고 몸으로 유리문을 밀며 깨금발로 힘겹게 약국에 들어섰다. 목발 손잡이에 감아 볼품 없어진 처방전을 건네고 약국 의자에 털썩 앉았다. 병원에 온 지 1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내 모든 체력을 소진한 것 같았다. 약사님은 약봉투를 손잡이가 달린 비닐봉지에 담아서 내 손목에 걸어주시고는 직접 유리문을 열어주셨다. 정형외과 앞에 있는 약국이니 목발 짚은 환자가 한둘이었겠는가. 경험에서 나온 그녀의 배려에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정말 오랜만에 부담 갖지 않고 기꺼이 도움을 받았다.


나는 분명 혼자서는 어려운 일을 할 때도 누군가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고마운 마음보다 부담스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도움을 받는 내내 안절부절못하며 도움 받는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길 빈다. 어쩔 때는 움 받는 게 불편해서 사전에 도움을 차단하기도 한다.  방금 시작한 일도  "거의 다 했어요.", 오래 걸릴 일도 "금방 끝나요." 하면서 도와줄 틈을 주지 않는다.


찰리 맥거시의 책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네가 했던 말 중 가장 용감했던 말은 뭐니?"
소년이 말했어요.

"'도와줘'라는 말."
말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용기가 부족했다. 이제는 누가 먼저 도와주기 전에 용기 내어 도와달라고 말해야겠다. 도움 받는 마음은 미안함이 아니라 고마움이니까. 기꺼이 도움 받고 충분히 감사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 은혜 잊지 않고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힘을 보태주면 된다. 물이 증발했다가 비가 되어 내리듯 누군가를 돕는 따뜻한 마음이 자연의 섭리처럼 순환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도와주 것 못지 않게 기꺼이 도움 받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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